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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행/역사유적

[대전명소] 층층 바위에 날리는 옥같은 물방울 층층 바위에 날리는 옥같은 물방울(玉溜) 선비마을 4,5단지 사이 뒷길에서 계족산으로 오르다 보면 옥류각과 비래사가 있습니다. 천년만에 용이 되어 오른 모임에 봄을 찾아 대에 오르느라 욕 되었네 시를 생각하여 백석(白石)이라 지었고 뜻에 따라 푸른 이끼에 앉았네 좁은 골짜기에 은옥같이 드리운 폭포가 계곡에 돌아 성난 우뢰소리 나네 武夷 九曲을 읊으나 하필 비래보다 낫겠는가 - 화산 김수창 좋은 친구는 인연 따라 이르는데 부축해 같이 대 위에 오르네 층층 바위에 날리는 옥같은 물방울 (玉溜) 장마비 푸른 이끼 씻었네 상냥한 말은 정답기 옻칠 같고 높게 읊음은 기운이 우뢰 같네 천지운행은 원래 왕복이 있는지라 이레면 친구가 다시 온다지 - 창구(충암김정의 유적)에서의 약속을 가을로 기약했기에 끝 싯구에서 말..
[대전명소] 옥류각상량문 [비래암수각상량문] 지난 여름. 대덕 문화원에서 어느 여성 교수의 수업에서 옥류각 상량문을 번역해서 설명하는 받으며 그 표현력에 감탄을 하였습니다. 대개 옥류각하면 현판과 초연물외 그리고 폭포수, 아이들에게 낙서하지 말라는 동춘당 선생의 글씨를 얘기합니다. 많은 자료가 있을것 같아서 저는 옥류각 상량문을 올려봅니다. 표현을 음미하며 한번 읽어 보시어요. 玉溜閣上樑文 [飛來庵水閣上樑文] 盖聞招提勝境。擧在雲水之間。兜率諸天。莫非藤蘿之外。雖釋流遁俗之所。 개문초제승경。거재운수지간。두솔제천。막비등라지외。수석류둔속지소。 대저 듣건대 사찰은 모두 구름과 물의 사이에 있고, 도솔의 모든 하늘은 등 넌출과 댕댕이 덩굴 너머가 아님이 없도다. 비록 승려들이 세속을 피하는 곳이지만, 亦游人探勝之塲。况復讓水廉泉。卽近仁里之物色。神丘福地。曾經嘉客之逍..
[대전여행] 대전시 성북동에 살고 있는 보살의 미소 11월의 날씨라고는 믿기지 않게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날! 산자락에서 들려올 낙엽들의 노래가 듣고 싶은 생각에 차에 올랐다. 계백로를 따라 달려 국도 4호선 논산방향으로 직진 서대전IC를 지나자 서낭댕이 고개가 나왔다. 이 고개를 내려가다 오른편에 성북동 휴양림 이라는 간판과 함께 방동저수지가 보인다. 우회전후 계속 직진하다보니 봉덕사 석조보살입상이라는 간판이 눈에 띤다. 보살이라는 이름이 나를 봉덕사로 향하게 했다.  봉덕사는 성북동 신뜸마을 동북쪽에 위치한 1940년대 지은 역사가 짧은 절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석문’이라 새겨진 와편이 출토되었고 에 “석문”이란 기록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꽤 오래된 사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명문와편이 발견되기 전에도 마을 사람들은 절 입구에 양편으로 큰..
[대전여행] 대전의 광영정과 유회당 종가를 방문하다. 대전의 광영정과 유회당 종가를 방문하다. 여행날짜 : 2010 - 11 - 20 위치 : 대전 중구 무수동 찾아가는 길 : 안영IC - 무수천하마을 여조때 호서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선생이 처음 터를 잡았던 유회당 종가는 화재때 손실되어 후손들이 1788년 현재의 자리에 옮겨 지은 것입니다. 광영정 지붕위의 자그마한 항아리처럼 보이는 뽀족한 모양이 눈길일 끕니다. 초가지붕을 고집하는 무수동 권씨집안의 미학적 안목도 돋보이고 개인 소유의 정자이지만 누구나 쉬어 갈 수 있게 담장이 없답니다. 유회당선생의 맏아들이 지었다고 합니다. 사방에는 각각 光影亭(광영정), 受月欄(수월난), 引風樓(인풍루) 그리고 觀欄軒(관난헌)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햇빛 달 바람 난간...... 나름 조상의 멋이 느껴집니다. 방..
[대전여행] 백제시대의 석축산성인 계족산성에 오르다 푸른하늘이 눈부시게 빛나던 날 대전에서 제일 긴 석축산성인 계족산성에 다녀왔습니다. 계족산과 식장산에 이르는 산지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으로 백제의 산성이 많이 존재합니다. 백제의 수도 웅진은 이곳으로부터 38km에 불과하여 이 산성들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이 산성을 근거로 한때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시키기도 하였으며,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산성 입구입니다. 메마른 나뭇잎들이 산성을 에워싸고 있에 하늘이 더욱 푸르게 보입니다. 성을 다 올라와서 뒤돌아보니 저 멀리 대청호수가 보입니다. 추운 날씨였지만 많은 시민들이 올라와 쉬고 있습니다. 성내에 6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남, 서, 동벽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합니다. 성내에..
[대전여행] 우암사적공원에서 역사와 자연을 한눈에 보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자연이 숨쉬는 우암사적공원에 다녀왔습니다. 대전시 블로그 기자단 팸투어 때 한번 갔었는 데요 제대로 못 본 것 같아서 근처에 일이 있어서 요번에는 제대로 여유 있게 찍었습니다. 우암사적공원이 왜 조성이 되었는 지 알려주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단순히 더퍼리 공원이라고 불려져서 학교에서 처음 소풍을 갔을 때 기대되는 마음으로 갔지만 나중에는 왜 또 가냐고 불평이 가득했었던 우암사적공원이였다. 그러나 어느 공원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꾸며놓았다^^ 낙엽이 떨어진 길이 정말 멋있었다. 우암 송시열 선생님의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유물관 우암 송시열 선생님이 보셨던 책들, 옷..등 많은 유물이 있었다. 덕포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덕포루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고 싶..
[대전여행] 부모님을 생각나게하는 유회당 부모님을 생각나게하는 유회당 여행날짜 : 2010.11.20 위치 : 대전 중구 무수동 찾아가는 길 : 안영I.C → 무수천하마을 조선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내 유회당 권이진 선생이 건물 뒤 산에 있는 부모님의 묘에 제사를 지내면서 독서와 교육을 하기 위해 1714년 숙종 40년에 지은 것이다. '유회'란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늘 품고자 하는 뜻이다. 주차장에서 바라보이는 정자입니다. 정자를 지나니 솟을 대문이 높게 서 있는 유회당이 반가이 맞아줍니다. 정문이 충효문 정문을 들어섭니다. 작은 연못도 있답니다. 유회당 판각 권이진 선생의 글을 모아놓은 판목(246판)으로 순조 초에 만들어졌는데 성리학 자료들과 일본의 외교자료가 있어서 당시의 학문과 국제정세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알..
유회당의 가을 이야기 (뿌리공원,철쭉,대전여행,대전명소,보문산,대전동물원,오월드)  무수동 천하마을에 들어서면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곳에 솟을 대문이 높게 서있는 유회당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언뜻언뜻 보이는 곱게 물든 단풍들이 가을이 깊어감을 전해 주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작은 정자하나 서 있어 지나가는 나그네와 들일을 하러 나온  농부들의 쉼터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품고 있다. 사방에 현판이 걸려 있어 돌아 앉기만 하면 네개의 정자가 되는 선조들의 지혜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여름 농부의 땀을 흘리게 했던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길을 가로질러 다다른 곳은 유회당의 정문인 충효문. 위회당 권이진 선생이 선친의 묘를 가까이에서모시고자 지은 건물로 후에 여경암과 거업제란 강학소까지 세운워 후학을 가르치셨다. '부모님을 샌각하는 효성스런 마음을 늘 품고자 하..
[대전여행추천] 충청지역 역사상 가장 큰 인물 우암 송시열, 그가 살던 곳 '우암사적공원' [우암사적공원,남간정사,우암송시열,우암,송시열,가양동,동구 가양동,대전여행,대전명소,동구명소,동구여행,대전팸투어,조선시대,병자호란,북벌론] 여행날짜 : 2010-10-16 위치 : 대전 동구 가양동 남간정사는 조선 숙종때 학자인 송시열이 말년에 강학을 위하여 지은 별당 건물이다. 2층 누각식 건물로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가의 암반 위에 세웠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 가운데 기둥은 연못 가운데에 세웠고, 나머지 기둥은 바위 위에 세워 계곡의 물이 건물 대청 밑에 흐르도록 설계히였다. 이곳에서 송시열이 전국의 유림과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북벌책을 강구하던 곳이기도 하다. 우암사적공원 입구입니다. 실개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남간정사 사적공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작은 솟을대문이 보입니다. 이 솟을대문 안에는 기국정과 남간정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남간정사는 낮은 야산 기슭의 숲이 우거진..
[대전여행] 우암 송시열의 혼이 살아있는 우암사적공원 [오감만족] 우암 송시열의 혼이 살아있는 우암사적공원 대전시 동구 가양동에 있는 우암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며 병자호란때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책을 강구하였던 곳으로 정절서원과 우암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종회사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공원에 남아있는 건물은 남간정사가 유일하고 다른 건물들은 모두 새롭게 조성된 것입니다. 이곳은 거의 모든 건물들이 새롭게 지어지긴 했지만 시간이 제법 흐르면서 어느정도 우리전통건축의 멋을 알수도 있고, 조용히 산책하기에도 충분히 좋은곳입니다. 특히 남간정사가 있는 장소는 굉장히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낮은 야산 기슭에 남향하여 있는 남간정사는 조선 후기의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학문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선생은 ..
[대전여행] 옛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계족산성에서... 2010 계족산성 부흥운동 산성의 도시 대전에서 산성축제가 열린단다. 무병장수를 빌면서 성밟기도 해보고. 현대인이 따라갈 수 없는 축조기술을 감히 한번쯤 손으로 만져보고 숨결을 느껴보자. 타임머신을 타고 머언 과거로 돌아가 하나하나 혼을 담아 쌓아 올렸던 지킴이의 마음을 어루만져 보자.
[대전여행] 우암 송시열 선생을 생각하며 - 남간정사 우암 송시열 선생을 생각하며 - 남간정사 높고 푸른 하늘 위에 구름이 수 놓은 가을 날 송시열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남간정사에 다녀왓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인 솟을 삼문 위 오래된 기왓장에서 생을 살아가는 초록의 풀들이 예쁘기만 합니다. 기와 문양이 푸른 바다의 파도 같이 생겼다고 해서 "靑海波文"이라고 합니다. 남간정사 가운데 두칸의 대청밑으로는 졸졸 시냇물이 흐릅니다. 흐르고 흘러 아래 연못을 만들지요. 지금 연못에는 개구리밥이 가득 덮혀 있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어 버렸습니다. 남간정사가 있는 뜰 안에는 기국정도 같이 있습니다. 기국정 후면과 측면입니다. 소나무의 자태가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기국정(杞菊亭)은 원래 소제동 소제방죽 옆에 있었던 우암의 별당입니다. 우암은 소제에 연꽃을 심..
초연물외를 꿈꾸는 곳 배래골(비럭골)은 대전시 대덕구 비래동에 위치하고 있는 고성이씨 집성촌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눈에 들어 오는것이 수이 오래되 보이는 느티나무 두그루가있다. 이 느티나무 밑에서 우리민족의 동제인 거리제가 지내지고 있는 도시속의 농촌마을이다. 비래골 느티나무 오른편으로 커다란 돌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라 하는 고인돌을 보게 된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하면서 발굴 조사가 이뤄졌는데 이곳에서는 금강유역에서는 최초로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다. (1호기) (2호기) 느티나무와 고인돌을 뒤로하고 조붓한 산길을 올라 숨이 차오를쯤 되면 눈앞에 오래된 목조 건물이 들어 온다. 제월당 송규렴선생이 동춘당 송준길 선생을 기리며 지은 누각이다. 당호는 동춘당선생의 싯귀' 층층 바위에 날리는 옥같은..
선비의 고장 대전 - 서원과 향교에서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며... 조선시대 깊은 학문을 겸비한 지조있고, 소신있는 문신들이 많이 배출된 대전을 우리는 선비의 고장이라 말합니다. 그에 걸맞게 우리 고장 대전에는 유서깊은 서원과 향교가 여럿 있지요. 아래 숭현서원, 도산서원, 진잠향교, 회덕향교를 다녀왔습니다. 유성구 원촌동에 있는 조선시대 김정·정광필·송인수·이시직·송시영·김장생·송준길·송시열 등을 배향한 사우(祠宇)입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樓입니다. 이 사우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자, 1609년 송남수(宋枏壽)가 다시 건립하여 삼현서원(三賢書院)이라 하였고, 그해에 유생들이 조정에 청액(請額)하여 숭현(崇賢)이라 사액되었습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헐렸는데, 1994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사당, 별사, 강당 등의 건물터가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대전 송촌의 삼강려 - 충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하자 장렬히 순국한 이시직공) [SONY] DSC-T1 (1/100)s iso100 F3.5 멋쟁이 두 친구. 동네에 산다며 장총을 들고 있길래 불러 세우고 이시직 선생에 대해 물으니 잘 모른다며 고개를 흔든다. 설명을 하면서 멋진 모습 담을테니 폼 잡으라 하니 얼른 자세를 취하는데..... 이시직(李時稷) * 자(字) : 聖兪(성유) * 호(戶) : 竹窓(죽창) * 년주대 : 1527년(선조5) - 1637년(인조15) * 관주직 : 별제, 정언, 장령 * 증주직 : 이조판서 * 유주적 : 충신정려(대덕구 송촌동) 이시직은 조선 후기의 문관·충신으로 호는 竹窓(죽창), 본관은 연안이다.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6대손이고, 찰방 이빈중의 아들이다. 연안 이씨가 회덕과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송여해(송유의 증손)가 이석형(이시직의 6대조..
삼강려 애각 송촌동 선비 마을 입구 동구밖에 있는 삼강려 애각이다. 송촌에는 유씨부인 정려, 이시직 충신정려, 송씨삼세 효자정려가 있다. 옛 부터 송촌을 일컬어 삼강려 고을이라 불렀으니 충신, 효자, 열녀를 배출한 마을이란 뜻이다. 송촌동 마을입구에서 동춘당방향 도로변 왼쪽편에 커다란 바위가 위치해 있고 이곳에 상·하송촌리 삼강려라 새겨져있다. 상·하송촌리는 지금의 송촌동을 상송촌, 중리동 쌍청당 지역을 하송촌이라 하였고 한마을에서 충신, 효자, 열부를 모두 배출한 것은 전국적으로 그 유래를 찼기 어려운 일이니 이는 회덕 송촌이 조선시대 전형적인 선비의 고장이었음을 입증하 고 있다. 송촌의 삼강려 중 유씨부인 정려와 이시직 충신정려는 지금까지 잘 남아 있지만, 송씨 삼세 효자 정려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정려 구허비만..
광산김씨 서포종중의 제사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저자로 잘 알려진 서포 김만중 12대조부님의 배위되시는 연안이씨 할머님의 제사를 올리면서 글과 사진을 싣는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제사와 그 법도를 아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며... 연안 이씨 할머님의 앞에 정경부인 이란 칭호가 붙는다 외국으로 치면 공작부인 그런식으로 .. 남편의 지위에 따라 칭호가 달라진다 설위-진설도에 의해 기구를 배치하고 제수를 진설하고 참사자가 배열한다 취신위-지방이나 사진을 교의에 모신다 퇴주잔과 분향을 준비하고 계시다 모사(모래)와 풀을 상징하는 띠묶음 제사상 차림이다 기본 진설법으로 홍동백서(붉은과일종류는 동쪽으로 놓고 하얀과일은 서쪽으로 ) 다시 한번 정확히 생선종류도 머리의 방향이 동쪽이다 예전보단 약식으로 상차림이 바뀌어서 ..
동춘당의 新 舊 모습 우리집에서 보면 동춘당 공원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위치의 사진에서 윗 부분은 공사 전의 모습이고 밑에 사진은 올 봄의 모습이며 녹음이 짙은 마지막 사진은 오늘의 동춘당 모습입니다. 동춘당 전체의 모습입니다. 말이 많았던 동춘당 광장과 약초원입니다. 약초원은 동춘당집에 병약한 동춘당 선생이 약초를 심어 약을 다려 드셨다는 문헌이 있어 그것을 토대로 동춘당 옛모습 찾기 (명품화)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국가 보물 209호 동춘당과 동춘당이 사셨던 사랑채와 안채의 뒷모습입니다. 동춘당 서쪽에 자리 잡은 공원 관리동과 화장실의 모습입니다. 우리집에서 본 동춘당 공원 뒷모습의 마무리 사진입니다. 동춘당은 국가 보물 제 209호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차차로 근접 촬영하여 올려 드리겠습니다.
동춘당의 사계 동춘당 옛모습 찾기 명품화 전의 동춘당 공원 4계절 입니다. 사진 기사가 재주가 좀 더 있더라면 멋지게 찍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여~엉 이라 조ㅡㅁ 망설이기는 했지만 보기 시원찮으면 직접 보러 오십시요. 사진으로 대충 보고 멋진 모습이 좀 더 있을 시기에 오십시요. [SONY] DSC-T1 (1/25)s iso100 F4.0 [SONY] DSC-T1 (1/30)s iso100 F3.5 [SONY] DSC-T1 (1/40)s iso100 F4.4 [SONY] DSC-T1 (1/30)s iso100 F4.4 [SONY] DSC-T1 (1/158)s iso100 F3.5 [SONY] DSC-T1 (1/8)s iso100 F3.5 [SONY] DSC-T1 (1/13)s iso100 F3.5 [SONY] DSC-..
[대전의 멋] 동춘당이 달라졌어요 [대전의 멋] 동춘당이 달라졌어요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192번지 지금은 비록 산(山) 대신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있고, 물(水) 대신 자동차 물결이 흘러가지만, 그곳에 가면 나의 애인 동춘당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1년 여 동안 동춘당공원 옛모습 찾기사업을 진행했는데,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우선 입구에 있던 외래종 소나무들이 사라져 동춘당이 훤하게 바라다보여서 즐겁네요. 아직 표지판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듯 한데, 표지석의 위치도 일각대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뀌었구요. 조심조심 두근두근 대문을 들어서니 동춘당은 여전히 소박하고 고즈넉한 선비처럼 앉아 있습니다. 다시 대문을 나와 공원을 돌아봅니다. 밑둥마저 흙 속에 파묻혀 위태롭기 그지없던 팽나무의 아래쪽이 시원합니다. 이제야 300년 넘게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