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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행/역사유적

대전 송촌의 삼강려 - 충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하자 장렬히 순국한 이시직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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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 두 친구.

동네에 산다며 장총을 들고 있길래 불러 세우고 이시직 선생에 대해 물으니 잘 모른다며 고개를 흔든다.
설명을 하면서 멋진 모습 담을테니 폼 잡으라 하니 얼른 자세를 취하는데.....

이시직(李時稷)

* 자(字) : 聖兪(성유)
* 호(戶) : 竹窓(죽창)
* 년주대 : 1527년(선조5) - 1637년(인조15)
* 관주직 : 별제, 정언, 장령
* 증주직 : 이조판서
* 유주적 : 충신정려(대덕구 송촌동)

이시직은 조선 후기의 문관·충신으로 호는 竹窓(죽창), 본관은 연안이다.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6대손이고, 찰방 이빈중의 아들이다.
연안 이씨가 회덕과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송여해(송유의 증손)가 이석형(이시직의 6대조)의 사위가 되는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이들 양 가문은 또 이정현(이시직의 조부)이 송세영(송준길의 증조부)의 사위가 되는 혼인관계를 맺게 되어 이시직도 송촌에서 살게 되었다.
이시직은 조호익과 김장생에게서 배웠고, 1624년(인조2) 직장으로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별제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하였고, 이어 정언·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강화로 들어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사복시 주부 송시영(회덕인)과 함께 자결하기로 약속하였다.
송시영이 먼저 자결하자 그는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고, 묘 둘을 파서 매장한 후 노복에게 다른 한 구덩이에 자신을 매장하도록 부탁하고, 옷을 벗어 객사의 주인에게 맡겨 이로써 염을 할 것과 후일에 그의 아들을 시켜서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게 할 것을 부탁한 다음 스스로 활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특히 아들에게 전하라는 편지글 중에는 "살신성인 하니 땅을 굽어서나 하늘을 우러러서 부끄러움이 없다." 라는 말이 들어 있는데, 이는 그의 고결한 선비정신을 보이는 대목이다.
그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이다.
강화의 충열사와 회덕의 숭현서원에 배향되었다.
1638년(인조16) 충신정문이 내려졌는데 그 유적이 송촌동에 있다. 
 
                                                                                               - 자료집

 


숭현서원

 
이시직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글

“장강(長江)의 험함을 잃어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술 취한 장수는 겁이 나 떨며 나라를 배반하고 목숨을 지키려 드는구나. 파수(把守)가 무너져 만백성이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하물며 저 남한산성이야 조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결하려 한다. 살신성인하려 하니 땅과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아 내 아들아. 삼가 생명을 상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 지내고,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거라. 그리고 깊숙한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구구한 나의 유원(遺願)을 잘 따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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