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마지막 날, 비가 많이 내려 좀 걱정됐는데 오히려 먼지가 모두 씻기고 3월1일은 푸른 하늘에 날씨가 정말 좋았습니다. 이번 삼일절은 99주년인데, 날씨도 풀리고 해서 기념식도 보고 현충원에 계신 아버지도 뵐 겸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았습니다.
99주년 삼일절의 날씨는 전날 내린 비로 공기 중의 먼지가 씻겨내려가고 기온이 올랐는데요. 봄이 성큼 다가온 듯 화창하고 공기도 맑아서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동동 떠다녔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참배객과 대전현충원 둘레길을 걷는 모든 이들을 반기는 것 같았습니다.
대전현충원 현충문
현충문에서는 마침 대전시청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마치고 참배하러 온 이재관 대전시장 권한대행 행정부시장을 비롯한 내빈들이 참배와 헌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참배를 마친 분들이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에 있는 소녀상을 참배하러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애국지사 묘지로 향했습니다.
나라를 잃고 타민족의
가혹한 지배를 받았던
민족의 치욕적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가
묘비마다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는데 그 중 한 순국선열의 묘비 앞에 섰습니다.
순국선열 최진동 선생은 1887년에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1941년에 중국 도문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원래 이름이 최명록이었는데 항일 운동에 뛰어들면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일곱 살되던 1890년에 가족과 함께 중국연변으로 이주해 중국인의 양자로 들어가 토지 통역관을 하면서 봉오동 일대를 사들였다고 합니다.
봉오동은 국사책에서 많이 들어본 곳이지요? 그곳은 당시에는 황무지였는데 독립운동을 할 수있는 난공불락의 군사요충지였다고 합니다. 최진동 님은 이곳에 봉오동 학교를 세우고 교육과 군사훈련에 매진했는데, 재산을 일부 정리해 200여 명의 병력을 부장시키며 일본군과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1920년 6월에 봉오동으로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맞아 일본군을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그 해 10월에는 청산리에서 청산리전투의 총사령관을 맡아 일본군을 대파했습니다. 청산리 전투 후 러시아로 이동했다가 중국에 돌아온 후 간첩으로 오인받아 중국경찰에 체포되어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1941년에는일본헌병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그해 별세했는데, 일본군에 의해 봉오동 한구석에 버려지듯 매장됐다고 합니다.
해방된 남한에 친일전력을 가진 정권이 서면서 항일운동을 한 분들이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한중 국교가 회복된 1992년에야 그 업적을 재조명하고, 2006년 4월에 유해를 모셔와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의 이 자리에 안장됐습니다.
순국선열 최진동 선생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혈서 동맹성고문
피창자천이여
사해를 광정하시고
아 이천오백만 민중을
극구하오며
광복대업을 속성히
하옵기를 혈로써
고하옵나이다
대한민국 이년 구월구일 해각 어 봉오동
봉오동에서 쓴 글에는 '대한민국 이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가 있었던 1920년이니 대한민국 원년인 1919년을 1년으로 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표기된 대로 1919년 3월1일 독립 선언한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3.1 만세운동은 1919년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됐습니다. 대전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주요 시장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지요. 3.1 만세운동과 독립선언의 의미는 한반도에만 해당됐던 것은 아닙니다.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해 1919년 3월1일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삼일 만세운동은, 당시 일본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던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중국에서 5.4 운동(1919)이 일어나게 된 기폭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서 큰 의미를 갖는 삼일절이 100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구태를 벗은 대한민국의 재도약을 꿈꾸며 오늘의 삼일절이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