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道山)은 조선시대의 명유인 만회 권득기 선생과 그 아들이신 탄옹 권시 선생을 모시고
두 분의 학덕을 기리며 후학들에게 강학을 하던 곳으로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220-1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본 서원도 철폐되었으나,
1968년에 함덕사를, 1973년에는 서원 건물들을 안동권씨 탄옹공파종중이 중심이 되어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원의 정문인 향직문에서 바라본 명교당의 모습입니다.
올곧음을 향한 문.
옛 선비들의 학문적 수행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현판입니다.
명교당은 지방의 학식있는 유림이 제자들을 모아 강학을 하던 장소입니다.
서원에서는 사당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건물이지요.
서원은 조선 시대의 교육기관으로 서당보다는 한 단계 위의 사립학교라고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서원에 배향된 만회 선생과 탄옹 선생에 대해 찬찬히 안내해 주시는 관리소 선생님.
광해군이 모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는 패륜을 저지르자 벼슬을 버리고 태안으로 낙향하여
평생을 도학 연구에 몰두하셨다고 합니다.
가훈으로 "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의롭지 않은 일에 빠지지 말라."는 십자훈을 남기셨는데요,
위 목판은 미수 허목선생의 친필로 된 전서체 글자로 '每事必求是'라는 첫구절입니다.
다음 구절은 '無落第二義'입니다.
옛 선비의 절의가 그대로 드러나는 명문입니다.
명교당 우측인 구인재.
명교당 내부.
좌측 온돌방인 귀본재.
지선재.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러 그것을 지켜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시습재
배운 것을 수시로 익히면서 학문적 기쁨을 찾았을 것 같은 공간.
서원의 유생들이 기거하던 장소입니다.
사당인 함덕사로 오르는 길.
함덕사 가는 길에 위치한 전사청은 제수 준비를 하거나 주로 제기를 보관하는 장소로 쓰입니다.
유정문을 지나면
이곳에 배향된 탄옹 선생은 만회 선생의 다섯째 아들로 학문적 소질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것은 탄옹 선생이 9세 때 그림자를 주제로 지은 다음의 시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네가 벌써 따르니(一步動時爾已隨)
은미한 마음가는 곳 네가 응당 알겠지.(微心去處爾應知)
슬프거나 즐겁거나 네가 짝하니(悲歎憂樂爾爲伴)
옳은 일 그른 일도 네가 스승 되어다오.(曲直正邪爾作師)
9세 때에 이미 그림자를 보고 이러한 시를 지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자질을 지녔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공자의 수제자인 안자에 탄옹 선생을 비유했다고 합니다.
탄옹 선생은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학덕을 갖춘 대학자로 추앙받았으며,
특히 세자에게 진강이 있을 때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신하이며 왕세자의 스승이 엎드려 하던 강론자세를
반듯이 앉아 가르치게 된 坐講의 법을 마련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올곧은 선생의 그림자가 사당 안에 그대로 머문 듯 여겨집니다.
어김없이 도산서원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름내내 화사한 빛깔을 내던 목백일홍꽃 무리들도 이제 가을 찬바람에 스르르 허물어지는 것 같습니다.
껍질(거짓되고 삿된 마음)을 벗어버리고 참된 본질만 남기는 나무.
가지를 뻗은 선들마저 학자의 기품이 서린듯 너무나 멋집니다.
은행나무도 유정문의 팔작지붕 위로 우뚝 솟아 자라고 있습니다.
은행나무의 뿌리처럼 그 근본을 튼튼히 해야 무수한 가지를 뻗는 나무가 되고
알알이 튼실한 열매를 맺게 되는 큰 학자가 되는 것임을
서원에서 공부하던 옛 선비들은 나무를 볼 때마다 가슴 깊이 새기고 또 새겼을 것 같습니다.
후문을 통해
나온 뒤
그림자마저도 삶의 스승과 지표로 삼았던 大儒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산서원 견학시간 및 안내 전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