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비가 '내린다'라고 말하기엔 너무하다 싶게 '쏟아붓고' 있습니다.
하늘에 정말 큰 구멍이라도 난 건지, 어디를 가더라도 비가 줄기차게 따라옵니다.
몸도 마음도 모두 눅눅해져 피로가 쌓이는 날들일 텐데요,
저는 오히려 雨요일에 집 가까이 자리한 숭현서원을 찾아 심신을 달래고 왔답니다.
영귀루 누각에 앉아 운무 가득한 먼 산을 바라보며 옛 선비들의 생각을 더듬더듬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싱그러우면서도 고요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요.
초중등 아이를 둔 분들이라면 더욱 더 찾아보면 좋을 곳, 유성구 원촌동에 자리한 숭현서원을 소개합니다.
'서원'이 어떤 기능을 하던 곳인지 혹시 아시나요? '향교'와의 차이점이 어떤 건지는? 입구에서 너무 많은 질문을 드리는 것 같군요.어려워 마시고 천천히 저를 따라오세요.
서원 입구에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일명 '하마비'라고 하는 비석인데요.'대소 관리들은 모두 여기서부터 말에서 내려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우리들도 모두 마음의 무장해제를 한 다음 이곳에 들어서야 할 것 같아요.
하마비 옆에는 홍살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홍살문은 신성한 곳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벽사(악귀를 내쫓는 역할)의 의미가 있어요.
영귀루의 모습입니다. 옛 선비들이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시를 읊조리기도 하던 숭현서원의 문루지요.
영귀루 현판의 모습입니다.
옛날에는 서원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의 물이 깊어 배를 타고 맞은편 산쪽 마을로 건너 다녔다고 합니다.눈을 감으면 도포 자락 일렁이며 나룻배를 타고 내를 건너는 옛 선비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것 같아요.멋진 자연풍경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이 완성되는...
날이 흐려 산자락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거세진 빗줄기에도 2층 누각은 평온하기만 합니다. 함께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진지하면서도 차분하네요. 이대로 시간이 멈춰주어도 좋을 것만 같았어요.
눈들어보면 저 멀리 걷혀가는 시름.
영귀루를 지나면 유생이 머무는 기숙사인 동재(우측), 서재(좌측)와 공부하는 공간인 입교당(정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동재
회덕현 숭현서원의 내력을 적은 비석인 '묘정비'입니다.1625년 상촌 신흠이 짓고 1667년 우암 송시열이 덧붙인 내용을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고 합니다. 현재의 비는 숭현서원을 복원하면서 2001년에 모사하여 놓은 것이라고 하네요.
서재
입교당 후면에 자리한 사당.서원은 원래 명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주로 합니다.또한 후학을 모아서 교육을 하는 기능도 같이 하였는데요, 조선 후기에는 애초의 기능이 잘못 쓰여져 흥선 대원군에 의해 '서원 철폐'라는 강력한 역풍을 맞게 되었지요.이곳 숭현서원은 처음 선조 18년에 수부 정광필,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세 분을 모시기 위해 용두록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합니다.광해군 원년(1609)에 송남수가 현재의 자리에 다시 세우면서 삼현서원이라 불렀고, 그 해에 나라로부터 '숭현'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사액서원이 된 것이지요.그후 사계 김장생, 죽창 이시직, 야은 송시영,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을 모시게 되어 팔현묘라고도 하였습니다.
사당의 측면.
사당의 후면.
현재의 숭현서원은 고종 때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묘정비만 남아 있던 것을 1995~2001년에 시에서 복원,정비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원은 요즘으로 치면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고, 향교는 공립학교라고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향교는 지방 수령이 관리 하였기 때문에 고을의 중심지에 주로 위치하지만
서원은 주변 경관이 수려한 곳에 위치한다는 점도 차이라고 볼 수 있지요.
비오는 날엔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요?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행복해진답니다. (마구마구 전염시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