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명물 대전역
대전부르스, 가락국수, 광장문화 기차역을 떠올리면 사람들은 추억에 찾는다.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시절 장ㆍ단거리를 오가는 교통편하면 철도였고, 대전역은 ‘대전 부르스’‘, 가락국수’그리고‘넓은 광장’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대전역 광장에 세워진 대전부르스 노래비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0시 50분…” 대전역 출구를 나오다 보면 대전사랑 추억의 노래비가 광장 한편에 서 있다. 대전부르스! 전국의 많은 사람들은 대전하면 바로 이 노래를 기억한다. 기차역에서 또는 인생살이에서 헤어지고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애절하게 불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술집 식탁을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목청을 세웠던 노래인가. 애절한 노랫말, 들을수록 가슴을 찡하게 하면서 뭔가를 확 잡아끄는 듯하다.노래 탄생 배경의 숨은 일화를 뒤적여 보자. 1959년 작사가 최치수는 어느 날 남녘으로 출장을 가게 됐다. 밤열차를 탄 그는 마침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대전역 플랫폼에서 쉬고 있었다. 철길과 역광장, 오가는 기차, 대합실과 승강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의 눈엔 사람들의 활기찬 움직임이 들어왔다. 시시각각 울리는 증기기관차의 기적, 칙칙폭폭 하는 열차의 움직임 소리. 기적소리에 취해 있던 그의 머릿속에 완행열차, 목포행밤 기차, 두 연인의 헤어짐과 아쉬움,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서민들의 일상 등이 맴돌았다. 출장을 다녀온 최씨는 그 때의 감흥을 메모해뒀다가‘대전 부르스’란 노래로 되살려냈다. 평범 속에서 발견한 비범이라고 할까. “어디서나 대할 수 있는 흔한 광경을 아름다운 노랫말로 승화시켜 보석을 만들어냈다”는 게 가요 평론가들의 분석이다. 게다가 가수 안정애의 창법도 특이해 노래가 선보이자 주목을 받았다. 애처로운 분위기에 호소력이 두드러지고 착착 달라붙는 느낌을 준다. ‘대전부르스’라는 가요는 1963년 개봉한 최무룡∙엄앵란∙신성일 주연의 영화‘대전발 0시 50분’에 삽입된 덕분에 장년층 이상이면 거의 전 국민이 기억하는 노래가 됐다. 영화 줄거리, 주연배우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도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멜로디와 구슬픈 가사, 특별한 인상을 주는 제목 때문에‘대전’과‘대전역’은 전국의 장년층 이상에게 깊게 각인됐다. 이 노래는 1980년대 가수 조용필이 리바이벌해 눈길을 끈다. 조용필이 부른‘대전부르스’는 또 다른 독특한 맛을 줘 장노년층의 사랑을 받았다. 1999년 대전역 광장에 대전부르스 노래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노래비에는 가수의 이름이 빠져있다. 안정애의 거부로 이름은 새겨지지 않았다. 후배 가수인 조용필과 함께 넣을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이름도 넣지 말라는 안정애의 단호한 뜻이 있어 지금도 이름을 새겨 넣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불러 크게 히트시킨 후배가수 조용필의 공을 고스란히 지켜주고 싶은 숭고한 마음, 남의 공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떳떳한 기개가 돋보인다. 이것이야말로 노래비 자체보다 얼마나 인간적이고 가슴 뭉클하게 하는 숨은 이야기인가? 이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남긴 가수 안정애가 있어‘대전 부르스’와‘대전’은 더욱 애달프고도 아름답다. 플랫폼 가락국수의 풍미와 낭만 기차를 타 본 사람치고 대전역 가락국수 맛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대전역에서 가락국수 훌훌 불며 기차가 떠날 새라 급히 먹던 낭만은 누구라도 잊지 못하리라. 국수를 말아주는 사람도 바쁘고, 먹는 사람은 더 바쁜 대전역 가락국수!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난 웃지 못할 추억들 뒤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1959년 제33호 완행열차는 전날 서울을 출발해 대전역에서 선 다음 새벽 0시 50분 출발해 종착역인 목포역까지 갔다. 현재는 대전역에서 호남선이나 전라선을 오가는 열차를 탈 수 없지만 1960년대 초까지 대전역은 분기역 영업을 했기 때문에 대전역에서도 경부선뿐만 아니라 호남선 등을 운행하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때문에 대전역 플랫폼에는 승객들이 항상 초만원이었다. 게다가 완행열차는 급행열차들에게 길을 비켜주느라고 항상 10여분 이상을 이곳에서 정차해 있어야만 했다. 그 덕분에 짭짤한 재미를 본 곳이 있었으니 바로 대전역 가락국수집이다.당시 가락국수 값은 1그릇에 30원이었으니 지금 가격의 100분의 1인 셈이다. 완행열차가 한번 섰다 하면 가락국수가 60그릇, 100그릇 불티나게 팔렸다. 긴 시간 완행열차를 타고 온 출출한 승객들에게 간단한 요기로 그만이었다. 국수 맛도 맛이지만 기차 놓칠세라 짧은 시간에 후루룩 먹어치우던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역무원들의 숨 가쁜 재촉도 견디어 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대전역 가락국수와 관련한 추억은 당시 대전역을 거쳐 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음직하다. 1983년 3월 대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기차가 잠시 대전역에 서게 되었다. 출출했던 여성 윤모씨는 대전역 플랫폼에서 먹는 가락국수의 쫄깃한 면발과 얼큰한 국물 맛에 반해버려 차마 잊어버려선 안 될 것을 깜박하고 말았다. 바로 그녀의 생후 6개월 된 아들을 기차에 두고 내렸던 것이다 가락국수의 맛에 취해 있는 사이 기차는 아들을 태운 채 떠났고, 윤씨는 뒤늦게 따라나섰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맛있는 가락국수 때문에 생이별하게 된 모자는 결국 역무원들의 도움으로 다음 기차를 타고 쫓아가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눈물 젖은 상봉이었다. 기차를 쳐다보면서 열심히 가락국수를 먹고 있는데 기차가 출발하여 허겁지겁 쫓아갔지만 다음 기차를 타야만 했던 일, 부랴부랴 가락국수를 먹고 포만감과 만족감으로 기차에 올랐는데 엉뚱한 기차를 타서 다시 바꿔타고 올라와야 했던 일. 이런 추억들이 묻어 있기에 대전역 가락국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별, 민주, 젊음의 추억이 어우러진 광장문화 1905년 1월 1일, 일제의 식민지 자원 수탈과 대륙침략 계획에 따라 개통된 대전역은 1919년 대구 역사를 본따 개축하였고, 1920년엔 지하도가 개통되었다. 행방 후에는 교통의 요지로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사람들과 물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마당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대전이 20여 일 간 임시수도가 되자 수많은 피난민이 목숨을 걸고 열차 지붕까지 매달려 대전에 들어왔다. 인구 10만이던 도시가 갑자기 100만 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임시수도가 부산으로 옮겨가자 피난민도 갑자기 떠나버리는 이별의 현장이 되었다. ‘대전부르스’가 유행하던 1960년대 전후에 대전역 광장은 전국에서 가장 넓은 광장으로 정치와 시위, 집회로 들끓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시해 사건 이후 북한을 규탄하는 궐기 대회로 대전역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대전의 고등학교 남녀학생들이 학교별로 교련복장을 하고 대전역 광장에 모여 금산 칠백의총까지 걸어서 행진하는 교련사열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1980년대 3김(김대중, 김종필, 김영삼) 선거 유세 땐 대전역 광장에서부터 홍명상가까지, 또는 충남도청까지 10만 명이 모였느니, 20만 명이 모였느니 방송과 신문지상에서 떠들어대기도 했었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하나로 모이는 최종 집결지가 대전역 광장이었다. 대전역 광장은 대학생들에게 젊음의 광장이었다. 배낭여행을 떠나거나 멀리서 친구를 만날 때면 으레 대전역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광장은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몇몇의 친구들을 기다리며 노래를 부르거나 술을 마시기에 너무나도 넉넉한 공간이었다. 역세권 개발‘새로운 명품’등극 기대 만발 이렇게 사람 많고 추억이 많던 대전역 광장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2005년 12월, 대전역 지하 동서통로가 개통되고 택시와 자가용 진입로, 지하철 환승시설이 들어서면서 대전역 광장은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널따란 광장에서 술 한잔 나누며 여름을 넘기던 추억들은 없다. 광장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비둘기의 모습도 없다. 언제 어디든 빠르게 갈 수 있는 KTX와 좀 더 빨리 집으로 갈 수 있는 지하철과 택시가 그 광장 언저리에서 귀가를 재촉할 뿐이다. 근대도시 대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온 대전역이 다시 큰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코레일 본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 28층 쌍둥이빌딩이 작년 9월에 완공되었다. 또한 대전시 동구가 마련한 ‘대전역 0시 축제’는 기차역의 상징이자 광장문화의 1번지 격인 대전역 광장을 중심으로‘대전부르스’를 소재로 한 이색 축제를 개최하였다. 이와 함께 대전시는 택시 및 지하철 환승시설로 사라진 대전역광장을 다시 복원할 계획이라 한다. 이러한 개발과 복원이 물질문명의 편리함뿐만 아니라 그 옛날 서민들의 애환과 추억까지도 담아냈으면 좋겠다. 대전역이 있어 대전 시민들이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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