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적 재료’의 향연
자연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실로 다양합니다. 그에 반하듯 현대인의 문명은 복잡하지만 매우 편향적이죠. 개발과 자본에 눈이 멀어 자연환경 귀중함의 가치를 등한시하는 국가의 일부정책, 그로 인한 생명의 말살. 그 수위가 위험수위를 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름답지 않은 세계에서 살다 보면 본래의 미를 간직하고 있는 ‘자연’에 관하여 보다 고차원적인 생각을 품게 됩니다. 원시적인 자연의 이치에 동화된 삶을 원하는 자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자연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 될 간절한 존재로 여겨지네요.
그 가치를 증명하듯, 답답한 생활에 쉼과 활력을 주고 그로 인해 정신의 생명력에도 숨을 불어 넣어주는 대단한 자연의 능력이 미술작품에도 발현되었습니다.
2017 이응노 미술관 소장품전은 <돌, 나무, 흙>과 같은 일상적이고도 특별한 자연물을 활용해 창작활동을 펼친 고암의 실험정신을 철저히 반영합니다.
그 외에도 <종이>의 찢어지고, 구겨지며, 눌리고 접히는 독특한 물질성을 다룬 작품. 그리고 재료확장에 조금도 망설임 없던 화백 ‘이응노’의 숙련된 모험심을 느낄 수 있는 <패브릭>을 이용한 작품도 전시됩니다.
전시의 구성은 작품 재료에 따라 나뉘는데요. 1전시실<종이와 패브릭>, 2전시실<세라믹>, 3전시실<나무>, 4전시실<돌>의 구성입니다. 1전시실에서 4전시실까지 유유히 흐르는 고암 이응노 화백의 작품엔 구체적인 형상은 없습니다. 그가 표현한 비형상(구체적인 대상의 재현을 거부한)의 미학엔 막힌 듯 답답함이 없죠. 재료인 자연물들이 전시 공간 내부를 생명의 흐름으로 장악하고 있어서 일까요.
‘평면이 입체적으로’ 종이의 대단한 능력
물체의 본바탕에 집중하여 질감을 표현해 내기에 종이만한 능력을 가진 재료도 드물죠. 종이의 다양한 성질은 다채로운 추상예술을 지향하는 화백 고암이 추구하는 가치와도 맞아 떨어집니다. 구기고 찢고 누르고 접고 붙인 종이의 단면은, 고암의 눈과 섬세한 손으로 인해 ‘입체적인 굴곡의 미’가 되었습니다.
‘종이’로 만든 작품은, 종이의 다변적인 움직임을 내포합니다. 단면적인 형태를 벗어나니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응집된 강인함과 부드러우면서도 거칠어질 수 있는 종이의 성질. 작품은 종이 본연의 성질로 인해 움직이는 생명력이 창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흔하게 지나치고 버려질 것만 같은 종이는 예술가의 손에 의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재창조 됩니다. 미술의 기본 재료라는 보편적 의미에서 벗어나니 평면이 입체가 되고, 단편적으로 느껴지던 사물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 것이죠. 고정관념을 탈피한 ‘역발상’의 힘입니다.
‘눈으로 느끼는 질감’을 선사하다. 직물이 곧 예술이 되는 ‘패브릭’
패브릭은 그 것이 ‘색’을 표현해내는 재료라는 1차원적인 시각보다도, 그 질감과 독특한 느낌에 주목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색을 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물감 대신 ‘패브릭’인 셈인데, 독특한 질감은 물감의 한계를 채웁니다.
‘타피스트리’(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작품은 종이와 섬유의 합작품인데요. 섬유의 재질만이 낼 수 있는 색감, 질감과 함께 고암 이응노 화백 특유의 추상적인 문자가 결합했습니다.
2005년 이응노의 작품 이미지를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의뢰하여 프랑스 국립 모빌리에 제작소에서 만든 타피스트리. 원작은 1972년의 문자추상 작품입니다. 모빌리에의 짜임새 있는 정교한 기술과 고암의 추상적인 표현력이 어우러진 작품은 그 색감과 질감 때문인지 전시장 내의 활기를 도맡습니다.
실용성 대신 예술을 선택한 세라믹 전시-‘세라믹’의 민낯
세라믹 작품의 부드러운 형태와 곡선이 일으키는 감각은, 세라믹이 본래 지닌 단단함이 아닌 ‘부드러움’입니다. 마치 진흙덩어리 사이로 끊임없이 물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라믹을 이용한 작품에는 접시는 없습니다. 뚜렷한 형태로 그 용도까지 파악할 수 있는 접시 작품은 없고,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 무의미한 작품들이 전시장을 지킵니다.
그 형태로 인해 실용성을 부각시키는 접시 보다 규정된 형태를 거부하는 독특한 작품들이 훨씬 더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이라 느껴지는 건, 단순히 작품을 향한 찬양으로 봐야 되는 걸까요? 미술작품이 지닐 수 있는 ‘자유로움’이 비교적 많은 작품에 더 애정이 가는 건 사실입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화백의 따뜻한 손길로 인해 차가운 세라믹의 성질에 온기가 느껴지는 현상도 작품관람을 통해 몸소 느낄 수 있습니다.
전시 작품해설집을 인용하면, ‘정중동’(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의 운동성을 세라믹 작품에 부여합니다. 움직일 수 없는 무형태의 세라믹 작품들은, 고암의 손으로 빚어진 굴곡으로 인해 ‘움직임’의 형태를 창조해냅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은 덩어리들이 고요하게 채우는 2전시실입니다.
‘형태가 없는 것의 굴곡’. 마치 형태가 없이 흐르는 인생의 굴곡을 작품에 비유하면 어떨지요.
정형화된 형태를 거부하는 목조 작품
나뭇결의 곡선, 끌로 파낸 거친 표면, 잘라진 단면 등 나무가 가진 고유의 특성이 작품에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한편, 전시 작품해설집을 정독하다 보면 ‘발견된 오브제’ 개념을 활용해 나무 토막 자체를 작품으로 생산하는 등의 다양한 양식의 작품이 뒤섞여 있다는 내용도 등장합니다.
'발견된 오브제'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발견되었다’는 독특한 수식을 안고 있는 이 오브제의 개념은, 프랑스의 혁명적인 미술가 <마르셀 뒤샹>에 의해 쉽게 설명되죠. 예술가의 의지만 있다면 기계제작으로 대량생산된 기성품들도 충분히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뒤샹은, 그간 미술계의 관습을 깨뜨린 새로운 미의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에 큰 획을 그은 마르셀 뒤샹이 주창한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는 혁명이었죠.
그 한 예로, 남성용 소변기를 이용한 기상천외한 작품은 공개되자마자 쟁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뒤샹은 그 소변기에 자신의 이름 대신 ‘R. MUTT 1917’이라고 서명했는데, 이 서명은 변기를 만든 욕실용품 회사의 이름이었던 것이죠. 소변기 외에도 술병걸이, 자전거바퀴, 삽등을 예술품으로 전시했습니다. 모두 기계 제작된 대량생산품이지만, 그것들이 생활 속 공간이 아닌 전시장으로 이동하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평범한 생활용품이 바로 ‘예술작품’으로서 존재하게 된다고 말이죠.
거의 손대지 않은 나무의 질감을 변형 없이 작품에 반영한 고암의 실험정신도 기성품을 그대로 예술품의 반열에 올린 ‘발견된 오브제’ 개념에 충실한 경우 입니다.
묵직한 ‘돌’이 전하는 오랜 세월
‘돌’로 인해 조각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고암은, 돌에게도 신비로운 생명과 불가사의한 삶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연 무생물인 단단한 돌도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흔하디 흔한 돌이 화백의 손을 거치며 옷을 입자 예술작품으로 승화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돌이 장식을 입고 전하는 예술의 기운은, 고요하지만 신비롭고 특별합니다.
예술가의 모험은, 작품을 통해 그 험난한 과정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다원적 재료를 이용한 고암 이응노 화백의 모험정신을 둘러보는 일은, 미술관 내에 벌어진 조용한 혁명을 관조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혁명을 관통하는 중심엔 ‘일관된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살아 숨쉬는 고암 이응노 화백의 전시가 1월 17일에 시작하여 3월 26일까지 진행됩니다.
설연휴기간 대전시립미술관 운영안내
설 연휴기간 운영 : 2017년 1월 27일(금), 29일(일), 30일(월) 정상개관합니다.
휴관일 : 2017년 1월 28일(설날), 1월 31일(화)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일(다만,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홈페이지 : http://dmma.daejeon.go.kr/main.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