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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상/대전사람들

50여년의 역사 한밭권투체육관 이수남 관장을 만나다

 

한밭권투체육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체육관입니다. 한밭권투체육관은 대전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대전 토박이면서도 이곳을 전혀 몰랐는데요. 이 근처를 지나갈 때 담배를 피우거나 술먹는 분들이 많아서 피해다녔기 때문이죠.

중앙로역 1번출구를 나오면 중앙로치안센터NH농협은행이 있는데요. 한사람이 통과 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 골목으로 진입하면 한밭권투체육관과 만날 수 있습니다. NH농협은행 화단에 아크릴 간판이 있어 한밭권투체육관 입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중앙로치안센터 뒷편 천막 아래는 젖은 운동복을 말리는 곳이고요. 한밭권투체육관의 지붕 모양은 배집형태입니다. 출입구에는 '한밭복싱훈련도장'이란 오래된 목간판이 걸려있네요.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는 좌측 코너에는 사각링이 있고, 우측에는 8단 신발장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권투글러브가 선반위에 놓여 있습니다.

 




바닥은 마루판으로 돼있고요.좌우측에는 권투포스터와 옛사진이 걸려 있어
여기가 오래된 체육관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켠에는 여자탈의실과 관장실이 있습니다.

한밭권투체육관의 운동시간은 오후 1시부터 오후 1030분까지입니다. 권투의 제1라운드를 알리는 공소리가 간격을 두고 울리곤하죠.

마루판에 앉아서 이수남 한밭권투체육관 관장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다부진 인상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동안이었습니다.

 



 

Q. 한밭권투체육관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말해주신다면?
"1961년도에 권투장을 개관했습니다. 현재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옆 건물(NH농협은행)이 그 당시 대전시청 건물인데요. 지금의 체육관은 그 시절 시청 부속창고였습니다. 그 옆은 보건소 굴뚝이 있었는데요. 시신을 태웠습니다. 그 당시는 바닥은 시멘트바닥이었어요. 30여년 전에 마루판을 깔았고요. 링도 설치했습니다.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이 1만 6,000여명 됩니다.예전에는 가난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현재는 30여명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밭권투체육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체육관입니다.이리에 있는 체육관은 우리보다 1~2년 늦습니다. 군산에 있는 체육관도 우리보다 늦어요. 현재는 아들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Q. 한밭체육관 설립을 비롯해 체육관이 배출한 인물 이야기를 듣고싶습니다.
"초대 관장 박찬규(사망)씨가 설립을 했는데요. 그 시기에 복싱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대전에 체육관이 30개 정도 있었습니다.WBC주니어페더급 챔피언 염동균 선수도 이곳에서 발굴한 선수고요. 경찰서장들도 있습니다.그 밖에 동양타이틀과 주니어 출신 선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Q.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제가 권투선수로 활동했던 1964년 동계올림픽때 조동기 선수와의 시합입니다. 최종선발 4차전에서 아깝게 졌습니다. 제50회 전국체전에서 우리 체육관 선수 11명이 출전해 권투부문 종합1위를 차지했습니다. 장충체육관에서 김용배 해비급선수가 시합후 쓰려져, 그 다음날 새벽5시 깨어났을 때는 정말 가슴아팠습니다. 광주에서 열린 야외시합때 KO로 이기자 시민들이 흥분해서 돌을 던져 경찰의 도움으로 겨우 피한 적이 있습니다.파출소에서 전화오면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이들을 데려 오기도 했고요."

Q.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유복자로 태어났어요. 땔감을 마련하는 일과 구두닦이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무척 고생하시다가 제가 13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보문중학교시절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끼니를 해결하려고 그랬죠. 1961년도에 한밭체육관을 다녔을 때 나쁜 곳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어머님 때문에 대흥동 성당에 다녔어요. 결혼해서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Q.무보수로 운동을 가르쳤다고요?
"권투는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줍니다. 대전소년원 190명 전원을 8년간 무보수로 운동을 가르쳤어요. 그 결과 제41회 신인왕대회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일로 공주지청 개관식때 당시 법무부장관이 감사인사를 전했죠. 1989년 보호관찰제도 1회 교화의원으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어요. 김종성회장 때인 50~60년대 권투는 깡패란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미지를 타파하려고 했어요. 또 대전에는 심판이 없어서 피해가 있었습니다. 1971년 중앙공인심판 자격증을 따서 활동했는데요. 그 여파로 한동안 대전과 충남지역이 제일 많은 심판을 배출하기도 했어요."

 



Q.여자 복싱선수가 있는지요?
"사진에 있는 학생은 대전여고 3학년으로 대하교 가려고 현재는 공부중입니다.”

Q.다른 곳으로 이사갈 생각이 있는지요?
"갈 곳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개인이 운영하기 때문에 지자체의 보조가 안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권선택 대전시장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더라고요.대전와 시체육회 사무처장님도 관심을 표하고 있고요."

Q.최근 근황은?
"CMB에서 촬영해서 뉴스에 나오기도 했고요. 영화 '차형사'를 이곳에서 촬영했어요. 4~5년전부터 방송사나 신문사에서 자주 취재하러 나오세요."

Q. 가족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아내는 21살 때 전주에서 시집왔습니다. 진달래꽃을 먹으면 골병에 좋다고하여 지금까지 먹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결혼 50주년입니다.TV에서 몸에 좋은 것을 모두 구입해서 복용하기 때문에 젊게 살고 있습니다.자식은 딸 2명과 아들 1명이에요. 큰 딸은 목원대를 졸업해서 피아노 강사를 했고요. 둘째딸은 성모여고를 나와 충북대 무용과를 졸업한 후 대전시립무용단에 있다가 시집갔습니다.아들은 한남대를 졸업한 후 일본에 다녀왔어요. 아내는 37년간 식당일을 하고 있어요."

Q.앞으로 소망이 있다면?
"권투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지만, 선수에 대한 집착은 안하려고 합니다.학교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사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수남 관장은 복싱계의 원로입니다. 현재 복싱 중계방송 해설사와 체육관 운영으로 한달에 버는 돈은 70~80만원. 체육관을 운영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것 같은데요. 그의 사무실을 들어다 보니 책상 하나가 있고, 벽면에 약간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지금도 검정색 다이알 전화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검소하게 사시는 것 같았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도 활짝 웃는 얼굴로 언제든지 오라고 배웅해주셨습니다.

이수남 관장은 작은 골목안의 체육관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고 도심속에서 생활하는 체육인입니다. 존경합니다.사랑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