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가볼만한곳ㅣ대전 서포 김만중의 문학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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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동 중심 사거리에서 화암 사거리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한의약 연구소가 나옵니다.
맞은편 골목을 보면 선비마을 표지석과 김반 김익겸의 묘 이정표가 보입니다.
그러면 그 주위에 오늘 찾아보고자 하는 김만중 문학비와
서포 김만중과 관련된 인물들의 유적들이 나옵니다.
그럼 먼저 서포가 태어난 이야기부터 들어갑니다.
때는 1636년 12월 청나라가 10만 군사를 대동하고
조선을 쳐들어와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을 포위합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637년 1월22일 난공불락이라는 강화성을 함락시키고
1월30일 조선의 국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병자호란이라 합니다.
병자호란 당시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은 강화도 사수를 맡아 항전했지만
끝내 지키지 못하고 강화유도대장 김상용과 함께
남문에서 화약을 터트려 자분(自焚)합니다.
윤씨부인 어머니는 전란을 피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애를 낳으니 그가 바로 서포 김만중입니다.
그러니까 전란 중에 유복자로 태어난 셈입니다.
비록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윤씨 부인은
아들 김만중의 교육을 참으로 엄격하게 시켜 키웠습니다.
▲ 서포 김만중 선생 충효 소설비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여름에는 발을 치고 겨울에는 병풍으로 가리고
아들 얼굴을 보지 않은 채 공부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들이 공부 잘 하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 얼굴에 화색이 돌면 교만에 빠질까, 반대로 공부를 못하면
노기 띤 어머니 얼굴을 보고 기가 꺽일까 염려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책이라면 살림 밑천을 털어서라도 구입하여 주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손수 필사하여서라도 공부에 지장이 없게 하였답니다.
▲ 연안서씨와 김익겸 정려
▲ 김반 신도비
▲ 왼쪽이 할아버지 김반의 신도비, 중간이 아버지 김익겸 정려, 오른쪽이 할머니 연안 서씨 정려
이런 어머니 윤씨 부인의 희생적 가르침으로
14세인 1650년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세인 1652년에 진사에 합격합니다.
그리고 166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게 됩니다.
1683년 대사헌에 임명되고, 드디어 1686년에는 대제학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 위 묘는 아버지 김익겸의 묘, 아래는 할아버지 김반의 묘
하지만 숙종 희빈 장씨를 둘러싼 기사환국에 관련되어
1689년 선천을 거쳐 남해(南海)의 고도 노도(櫓島)로 유배 길에 오르게 됩니다.
서포 김만중은 문인답게 유배지 노도에서도 좌절하지 않았고
창작에 전념하여 우리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글소설인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집필하게 됩니다.
다 아시다 시피 ‘사씨남정기’는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것이나
그 내용은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한 것을 풍자한 내용입니다.
‘구운몽’은 홀로 계신 어머니를 위한 소설로 육관 대사의 제자 성진이
꿈속에서 여덟 명의 선녀와 함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것은 결국은 일장춘몽임을 깨닫고 수도하여 마침내 극락세계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 김만중의 효 정려각
서포 김만중은 ‘국문가사 예찬론’을 통해
소설은 마땅히 한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어느 나라에서건 자기나라 글에 기초한 문학이
진정한 문학으로 발전됨을 볼 때 우리나라 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담겨 있는 ‘구운몽’은 높이 평가 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 김만중의 석상
다시 정리를 하면 서포 김만중은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으로 태어나지만
아버지가 병자호란 당시 1637년 1월 22일 강화성이 함락되자 적에게 유린당하지 않고
충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때 할머니도 함께 목숨을 끊습니다.
아들이 가고자 한길을 어머니도 같이 한 것이지요.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순절할 당시 나이는 23세의 젊은 나이였고,
이로 인해 어머니는 그만 21세에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서포 김만중 자신의 말년도 유배지 남해의 노도(櫓島)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56세의 나이로 기구한 생을 마감합니다.
▲ 서포 김만중선생 문학비
1689년 9월25일 어머니 생신날 남해의 외로운 섬 노도에서 유배의 몸으로
어머님을 그리며 쓴 사친의 시를 읽으면 서포 김만중 문학비를 찾아 떠난 발걸음을 접습니다.
사친(思親) - 어머니를 그리며 -
김만중(金萬重)
今朝欲寫思親語 (금조욕사사친어)
字未成時淚已滋 (자미성시루기자)
幾度濡毫還復擲 (기도유호선복척)
集中應缺海南詩 (집중응결해남시)
오늘 아침 사친의 시 쓰려 하는데
글씨도 이루기 전에 눈물 먼저 가리우네
몇 번이나 붓을 적시다 도로 던져 버렸나
응당 문집 가운데 해남의 시 빠지겠네.
이 시는 서포 김만중이 노도에 유배되어
첫 번째 맞이한 어머니의 생신날 지은 시라고 합니다.
선천 유배에서 해배 되어 잠시 어머니를 뵈었지만
또 다시 남해 노도로 유배를 당하니 어머니 그리는 정이 더욱 사무칠 수밖에 없었겠지요.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 시를 쓸 수 없어
문집에 빠지게 되리라는시가 오히려 문집에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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