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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전시ㆍ강연

광복7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 사진전(대전시민대학 장암관)




 광복7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 사진전(대전시민대학 장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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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단한 역사


1945년 광복을 하였으니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입니다.

광복7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전이 열렸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진전으로

한중교류문화연구소 이용우 대표가 직접 중국 현지를 답사하며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현장을 함께 보실까요?




 


 

사진은, 임시정부가 머물렀던 장소를 따라 가며 전시되어 있습니다.

1919년 상하이(上海)에 임시정부가 들어선 후 1945년 해방으로 귀국하기까지

26년 동안 중국땅에서 고단한 항일 투쟁을 이어왔는데요,

위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군에 쫓기어 점점 내륙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상해(상하이 1926.7~1932.4) ->

항주, 가흥(항조우, 지아싱 1932.5~1935.11)

-> 진강(쩐쟝 1935.11~1937.11)

 -> 장사(창샤 1937.11~1938.7)

-> 광주(꽝조우 1938.7-1938.8)

-> 유주(유쭈 1938.10~1939.3)

-> 기강(치쟝 1939.3~1940.8)

-> 중경(충칭 1940.9~ 광복)

 

 




 

1. 상하이 임시정부 (1919.4~1932.4)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上海)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상하이로 패키지 여행을 하는 경우에 거의 필수 코스로 임시정부 청사 방문이 들어있는데요,


저도 2003년에 패키지 여행으로, 그리고 개인 여행으로 2007년에 한  번, 모두 두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갔던 당시에는 중국이 건축 개발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이라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주변이 모두 고층 건물과 아파트를 짓는 건축 현장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상하이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곳도 금방 헐어버릴 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직 유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중요한 유적이 남의 나라 땅에서 그곳의 선처만 바라며 전전긍긍하는 상황도 괴롭긴 하지만, 

그래도 당시에 자국땅을 잃고 남의 나라 땅에서 임시정부를 꾸려야했던 

고단한 한민족을 받아준 중국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유적으로 보존하는 상황은 정치적 문제이니, 

우리 정부가 중국 정부와 잘 지내면 외교적으로 해결될 수있는 문제일것이고, 

변화와 발전의 속도가 LTE급인 중국이 무조건적인 개발 광풍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아 

 중국도 무조건적인 개발보다는 역사가 담긴 생활사들을 유지보존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옛 문물 파괴와 개발이 능사는 아니고, 

한번 파괴하면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시간이 담긴 역사가 영영 사라지게 되니까요. 

중국의 오랜 지혜가 담긴 역사가 그런 것을 깨달았길 바랍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유적이 개발의 이름하에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는지 잘 알고 있잖아요.

 

 


 

 

사진에는 홍구공원이라고 나와있는데, 

현재 중국 상하이에서 홍구공원을 찾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광인일기', '아큐정전(阿Q正傳)'을 쓴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루쉰(노신)의 이름을 따서

루쉰공원(루쉰꽁위앤)이 되어 있습니다.

그 한 켠에 '매헌'이라는 간판을 단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서 있습니다.

 

 


 

2. 항조우 임시정부(1932.5~1935.11)

항조우()도 간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만 알았지

항조우에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항일 역사인데 왜 이렇게 교육 내용에서 허술하게 다루는걸까요?

저만 몰랐던 것이라면 다행한 일이고요.


미군정 시기에, 지식계층일 수 밖에 없었던 친일 인사들을 다시 기용하여 곳곳에서 쓰면서

친일사관에 의한 역사교육의 영향이 아직도 많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처절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임시정부를 꾸리던 선각자들이 안계셨다면

우리는 1945년 2차대전의 종식과 함께 갑자기 닥친 광복 상황에서도 떳떳할 수가 없을겁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하신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의 독립과 건국에도 세계를 향하여 당당할 수 있는 것이고요. 

 


 

 


 


 


 


 


 


 


 

3. 진강임시정부(1935.11~1937.11)

참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기입니다.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은 '만주국'이라는 식민 국가를 세우고 

영화 '마지막 황제'에 나오는 것처럼

청나라의 후예 푸이를 황제로 내세우게 되죠. 


일본의 중국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1937년 전장이 중국 전 국토로 확장되고(중일전쟁) 

1937년 12월,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인 남경(난징)을 점령하여

남경시민 수십만을 학살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하였습니다.


진강이 남경 부근이니 1937년 11월 쯤엔 다시 피난 보따리를 꾸릴 수 밖에 없었겠네요.

진강시는 충남 아산시와 교류가 있다고 하네요. 




 



4.장사 임시정부(1937.11~1938.7)

중국대륙 내륙으로 일본군의 침략이 가속화되고 

남경(난징)에서 남경 시민 대학살이 벌어지면서

옮긴지 몇 개월만에 다시 내륙으로 이사해야 했던

 긴박감이 여기에서도 느껴집니다.

 


 

 


 


 

5.광주(꽝조우)임시정부(1938.7~1938.10)




 


 

중국 남쪽 꽝조우시에 있는 [황포군관학교]는

우리의 독립군도 훈련을 했던 곳입니다.


중국, 대만에서 모두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쑨원)이 설립(1924년)하여

장개석을 교장으로 하여 운영한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였습니다.

꽝조우 부근의 중산시(中山)가 쑨원의 탄생지여서

탄생지를 호처럼 '손중산'이라고도 부르지요.

 


 

 

이상향을 말할 때 부르는 '샹그릴라'의 고장 운남성에도

황포군관학교보다 앞서서 [운남육군강무학교]사 설립되었고,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우리의 독립군 이범석 장군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1919년에 12기로 졸업하였다고 합니다. 

1900년 생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 운남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할 당시 우리나이로 스무살이었네요.

 

 


 


 


 


 


 


 


 


 

8. 중경(충칭)임시정부(1940.9~1945.11)

세계적인 전운이 감돌던 1940년 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급기야 중국 중부 내륙지방의 충칭까지 들어가게 되고 그 곳에서

제2차세계대전의 시기를 지나 종전과 함께 찾아온 해방으로

한반도로 귀국을 하였습니다. 

 

 


 


 


 


 

 

겨우 100년 사이에 한반도에 몰아친 거센 운명의 바람을 타고

지금의 시점에 이르렀는데요,


2019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망명정부로 외국에 설립된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여행코스가

大국민적으로 시행되어도 의미있을 것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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