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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행

송촌의 삼강려 - 효 (송경창, 송시승, 송유관의 3세에 걸친 효자비)




송씨삼세효자정려구허비

송경창, 송시승, 송유관의 3세에 걸친 효자비


송경창 (1541-1592)

임진왜란시 피난길에 올라 보은군 회인을 지나다 왜적과 마주쳤다
당시 왜구는  "노인들이 젊은이들을 자극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한다." 하여 보는 대로 죽였다. 당시 경창의 아버지 응수도 적의 칼날 앞에 서게 되어 응수가 왜적을 꾸짖자 적의 칼이 내리치니 경창이 아버지를 막고 나서자 적은 경창의 두 팔을 자른 후 부자를 함께 살해 했다.
아들 계록은 아버지와 아들이 왜구에게 피살 되는 것을 목격한 후 복수심을 기르다가 무과에 급제한 후 정유재란 때 거제도에서 싸워 전과를 올렸고 원종공신에 책록 되었다.


송시승 (1583 - 1683)

송계록의 아들로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함.
아버지 계록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아버지 입에 넣기를 여러번하여 며칠동안 목숨을 연잘 하였고 ,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10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해 병환을 간호함에 효성을 다하였다. 상중에는 죽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너무 슬피 울다 눈이 멀었으며 아들 유관도 효행으로 정문을 받았다.


송유관 (1627 - 1665)

시승의 아들로 동춘과 우암 문하에서 수학함.
어머니 박씨 부인이 위중함에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험이 없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받들어 며칠동안 생명을 연장 하였으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다 몸을 많이 상함.
효행으로 의금부 도사의 증직을 받았다.


그의 증조 송경창,  아버지 송시승과 함께 3세가 효행으로 정문을 받았으므로 이 세 분을
" 은진송씨 3효자"라 일컫고 있다.  또 그의 할아버지 계록은 아버지 경창과 할아버지 응수에 이어 정유재란 때 거제도에서 공을 세워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렇게 4대가 송촌에 살면서  3孝  1忠의 가문을 이룩하였으며
"송씨3세효자정려구허"비가 동춘당 공원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