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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행

송촌동의 삼강려 - 열 (고흥류씨 정려각 및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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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씨 부인은 쌍청당 송유의 어머니이다.
그는 고려말인 1371년(공민왕 20) 상서를 지낸 호안공(胡安公) 유준(柳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진사 송극기(宋克己)와 혼인하였으나 약관의 나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22세에 홀몸이 되었다.
청상의 몸으로 유복자 송유와 함께 개성의 친정에 살고 있었으나 가엽게 여긴 친정에서 재혼을 종용하였다.
당시 사회풍습으로 재가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얼마 후 풍습대로 친정에서 재혼을 서두르자 한밤중에 아들을 데리고 500리가 넘는 시가인 이곳 회덕으로 내려왔다.
재혼에 뜻이 없었음이 분명했다.
그 후 유씨 부인은 시댁에서 시부모  ( 은진 송씨의 입향조 송명의 )를 극진히 모시고 아들을 훌륭한 선비로 성장시켰다.
생전에 그는 효행이 뛰어나 그 소문이 자자했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 세상을 뜨고 나서 약 200년 후인 1653년(효종4)에 그의 정절을 기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구릉지에 주위를 담으로 에워싸고 그 안에 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정면, 측면 각 1칸의 정려각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작은 규모이지만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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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옆에는 1665년(현종6) 동춘 선생이 비문을 짓고 우암 선생이 쓴 정려비가 서 있는데 정려를 받게 된 내력과 후대까지 정려를 보존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내가 대전 곳곳을 돌아보니 대개는 비문 글씨는 동춘 선생이 썼으나 이 비는 반대로 동춘 선생이 비문을 짓고 우암 선생이 글씨를 써서 서예 하시는 분들이 글씨를 보러 많이 찾고 있다고 ...... 











대청호반의 고흥 류씨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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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묘려에서 본 거북섬


원래 시 외가인 회덕 황씨가의 묘자리에 밤 새 물동이로 물을 퍼 부어 묘를 옮기게 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묘를 썼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지금도 회덕 송씨가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5일에 류조비의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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