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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행/박물관ㆍ시설

6월 호국보훈의달 국립대전현충원 여성 애국지사를 찾아서

대전은 송촌동, 무수동에서 뿌리공원까지 이어지는 유교 사상을 담은 도시이기도 하고, 국립대전현충원이 있는 등 근현대 나라사랑의 충정이 담긴 도시이기도 합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주변 길은 대전방문의해를 맞아 우리나라 최초로 호국 보훈 테마거리인 나라사랑길로 조성되고 있습니다. 365일 어느 하루도 그 숭고함이 가시지 않는 날이 없는데요. 특히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함께 10㎞에 이르는 무지개 빛깔의 보훈둘레길이 있어서 많은 국민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국립대전현충원의 곳곳에는 순국선열을 되새기게 하는 좋은 글귀가 새겨진 석비가 곳곳에 서 있습니다. 지나면서 한번 씩 읽어보면 국립현충원의 의미가 더욱 진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해보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겨레의 자존과 나라의번영을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오랜 역사를 지켜오면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 피우고 타민족의 무수한 침략을 물리치며 오늘날까지 민족사의 정통성을굳건히 지킬 수 었었던 것은 강인한 민족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비를 읽어보고 충현지에 한가롭게 노니는 새들을 보며 발길을 옮긴 곳은 애국지사 묘역이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곳곳의 묘비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헌신하지 않으신 분이 없겠지만, 특히 애국지사 묘역에는 어떤 분이 영면하고 계신지 보고 싶었습니다.

묘역이 넓어서 하루에 다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에 별로 가보지 못했던 애국지사 1묘역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애국지사들의 묘와 묘비가 가지런히 있고 말끔하게 정돈돼 있었습니다. 

줄지어 있는 묘를 지나며 특히 눈 여겨 본 것은 여성 애국지사였습니다. 남성 애국지사의 이름은 줄줄이 댈 수 있을 정도로 학창 시절을 지나며 교육을 받았는데, 여성 애국지사는 유관순 열사, 조마리아(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곽낙원(김구선생의 어머니) 정도만 금방 성함을 댈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몇 년 전 영화인 '암살'에서 전지현이 열연했던 안옥윤은 실제 여성독립투사인 남자현을 그린 것이란 것을 알면서 남자현 열사의 성함을 한분 더 마음에 새겨 넣었지요. 

최근에 여성톡립투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우리가 그동안 미처 새겨넣지 못한 많은 여성 독립투사가 있는 것도 알게됐습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전면에서 독립투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후방에서 독립투사를 지원하는 역할을 한 많은 여성들 또한 우리나라 독립에 헌신 한 분들이라는 것까지 시각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애국지사 1묘역을 걸으며 성함을 살펴 보았습니다. 함자만으로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묘비 뒤의 가족사항까지 읽어봐야 했습니다.  

애국지사 박현숙(1896~1980)

'삼일운동 때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중) 송죽결사대를 조직해 일제와 싸우다가 세 차례나 치르셨고 역시 독립운동하다가 반신불수가 된 남편(김성업-일제강점기 동아일보 평양지국장) 몫까지 일하며 자신에겐 냉혹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웠던 멋있는 여자고 대장부였다(시인 송현 씀)'고 합니다.

애국지사 최이옥(1926~1990), 박성관(1923~2009) 부부가 모두 평북 용천 출생의 애국지사로 함께 영면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한 곳 씩 이처럼 빈 곳이 보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국립대전현충원을 떠난 분이겠지요.

애국지사 최갑순(1898~1990), 송세호(1893~1970), 부부가 모두 애국지사로 남편은 1970년 상해에서 서거하고 1981년에 영현을 조국으로 봉송했다고 합니다. 최갑순 애국지사는 1990년 홍콩에서 서거했습니다. 

애국지사 민영숙(1905~1988) 충남 천안 출신으로 천안국 입장면 화립광명여학교 재학중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고 합니다. 

애국지사 신경애(1907~1964)는 개성에서 출생해 근우회 집행위원, 신간회 간사로 활약, 반전동맹조직 활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고 돌아가신 후 44년이 지난 2008년에야 건국포장에 추서됐다고 합니다.

순국선열은 산화(散華) 하셨고 묘비 주변의 흰 꽃은 말 그대로 산화(散花)한 모습이 뭔가 처연함을 불러일으킵니다. 산화한 흰 꽃을 지나 만난 묘비는 애국지사 조신성의 묘입니다.

애국지사 조신성(1871~1953) 평북 의주에서 출생, 22세에 남편과 사별한 후 34세에 일본에 유학해 교육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화학당 기숙사 사감을 지내고 평양에서 안창호 주도로 설립한 진명여학교에서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을 했고,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1920)하여 항일무장투쟁활동 중 일경에 잡혀 옥고를 치뤘다고 합니다.

조신성은 근우회 평양지회를 조직(1928)하고 중앙집행위원장, 여성실업장려회를 조직해 회장(1930)을 지냈습니다. 헌납금을 임시정부에 보내고 독립운동가를 피신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민족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조선교육학교를 설립(1932)하고 해방 후에는 북조선 여성동맹위원장으로 있다가 70이 넘은 나이로 월남(1945)해 대한부인회 부총재(1948)를 역임했습니다.  

한국전쟁 중인 1953년에 부산에서 병사했는데, 자식도 없이 교육에 매진한 조신성의 헌신을 기리면서 1956년에 5월8일을 어머니날로 정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날은 1973년에 어버이날로 바뀌었습니다.)

묘비에는 1871년 출생으로 되어 있는데 여러가지 자료 기록에는 1873년 출생으로 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묘비가 잘못 새겨진 것 같습니다. 

애국지사 1-1 묘역, 국가*사회공현자 묘역으로 가면 여성 독립운동가는 아니지만 익숙한 이름이 보입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 마라톤 당시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손기정(1912~2002)의 묘가 보이고 신현확 전 국무총리부부의 묘도 있습니다.  신현확 전 총리는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과시험 행정과에 합격(1943)했고 1979년 10.26 사건을 맞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습니다.

필자가 어렸던 시절, 단시 정치는 군사독재시대였는데도 불구하고 표면으로는 정치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삼권분립이라고 강조하던 시절의 사법부 수장이 민복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민복기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고등문과시험 사법과에 합격했고, 일제 후작인 이완용과 사돈지간인 민병석(일제 자작)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세한 내용까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네요.

얼마전에 매스컴에도 등장했던 탈북인사 황장엽(1923~2010)의 묘도 이곳에 있습니다. 일반 북한 사람이 넘어오면 탈북인이라고 하는데 황장엽은 자료를 찾아보니 굳이 '망명'이라고 고급진 단어를 썼네요. 1997년에 대한민국으로 넘어왔는데, 북한의 '주체사상'을 창시한 이론가입니다.

여성 애국지사 김신희(1899~1993) 은 전주 기전여학교 재학 중 1919년에 독립만세운동 결사대 일원으로 활약하고 일제의 보안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뤘습니다. 당시 기전여학교의 여학생들이 일경에게 무더기로 잡혀갔다고 하네요.

여성 애국지사 주윤애(1903~1995)는 전남 해남 출신으로 목포 정명여학교 재학 중 만세운동을 주도한 주모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고 합니다.  이후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남편과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며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다고 합니다.

지나며 보니 익숙한 이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 사랑방송님과 어머니를 쓴 주요섭의 묘도 있습니다. 윤석중은 80년 가까이 동시를 지어 1200 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800여 편이 동요로 불리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오래 불리고 있는 노래는 바로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로 부르는 어린이날 노래입니다. 1948년 동시집 굴렁쇠에 실렸다고 합니다.

애국지사 주요섭(1902~1972)은 17세인 1919년에 지하신문을 만들다가 일제에 잡혀서 옥고를 치뤘습니다. 1930년대에 당시 사회를 배경으로 한 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 등을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1941)한 후 북경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다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죄로 일제에 점령된 중국에서 옥고를 치뤘습니다. 

일단 애국지사 1묘역과1-1묘역에는 여성애국지사가 많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몇몇분의 활약을 보더라도 그 분들이 당시에 쓰개치마를 쓰고 다니며 최소한 '조신'하게 살던 분은 아니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 서훈을 받은 전체 14000여 명 중 여성 독립운동가가 270여 명으로 1.9%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자료가 많지 않다고 하는데 그럴 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발굴해서 그 뜻을 기려야 하며, 이것도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