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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행/역사유적

대전옛건축여행 동춘당(同春堂) 공원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요

동춘당 공원 (대덕구 송촌동)


2019년 새해 타종식을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입춘(2월 4일)도 지나고 우수(2월 19일)도 지났어요. 이제 며칠 후 경칩(3월 6일)이 지나면 그야말로 봄인데요.

우수 겸 정월 대보름을 지난 동춘당 공원을,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산책을 했습니다. 동춘당 공원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송준길(1606-1672)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 이름에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동춘당공원 안내도


동춘당 송준길선생은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는데요.
 모든 관직을 물러난 후 거처하던 종택과 더불어, 늘 봄과 같다는 뜻인 선생의 호 동춘당(同春堂)을 따서 지은 별당 건물입니다.

동춘당은 1963년에 보물 제 209호로 지정될 정도로 건축학적 의미가 크다고 해요.


보물 제209호 회덕동춘당


동춘당은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유형을 잘 보여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조는 앞면 3칸·옆면 2칸 총 6칸인데요.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 왼쪽 2칸은 온돌방입니다. 대청의 앞면·오른쪽·뒷면 등 3면에 쪽마루를 냈고, 들어서 여는 열개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이 모두 열리는데요. 아직은 날씨가 쌀쌀해 문을 열어놓지 않았네요. 여름에는 열개문이 모두 열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돼 있는데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없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활용해 무대가 있는 정자 같은 느낌을 줍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건물 전체를 4각형의 키가 높은 돌로 받쳐놓은 것인데요. 이런 양식은 조선 후기의 주택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건물 전체를 돌로 맏쳐놓아 대청 아래 공간이 높은 동춘당


동춘당이라고 쓰인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라고 합니다.




동춘당 뒤쪽으로는 종택이 있어요. 이곳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서, 지난 2016년에는 국가민속문화재 제289호로도 지정됐습니다. 

동춘당 왼쪽 담장을 끼고 진입로를 지나 대문을 들어서면 자 모양의 사랑채와 자 모양의 안채가 있고요. 그 오른쪽에는 사당인 가묘와 별묘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춘당 종택에 대한 안내판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아직도 동춘당에 대한 불천위 제사와 기타 졔례가 행해진다고 합니다. 또 건축학적으로는, 사랑채와 안채, 부엌, 마루 등이 한 채에 달려 있는 양통집이라고 합니다.



동춘당 종택 대문


사랑채는 앞면 6·옆면 6칸입니다.

부엌 위는 다락으로 꾸몄고앞에는 1칸 살림집을 달았는데, 여기에서는 집안의 여러가지 일을 맡아보던 청지기가 살았다고 합니다. 또 대청마루와 큰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가작은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보다 2배 정도 높은 누마루가 있고요. 그 아래로는 아궁이가 있습니다.  참 독특한 구조이지요. 



ㅡ자 모양의 동춘당 종택 사랑채

안채에는 현재 송준길선생의 후손이 살고 있어요.

동춘당가의 가양주로 오래 내려오고 있는 '국화주'가 대전무형문화재 제9-나호로 지정돼 있는데요. 이 곳에서 살고 있는 동춘당의 13대 종부 김정순 보유자가 아드님, 따님과 함께 보존 전승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동춘당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음식과 국화주 등을 테마로 하는 여러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어요.  '동춘당가 500년 여름 생신상' 행사가 대표적이죠.

동춘당 종택 별묘(왼쪽)와 가묘(오른쪽)


동춘당과 종택의 오른쪽 뒤로는 또 하나 전통 가옥이 보입니다. 소대헌·호연재 고택이 자리잡고 있는건데요.

건물 앞에는 빗과 비녀 모양의 조형물과 함께 소나무 아래로 시비가 있습니다. 바로 호연재 김씨의 시비입니다.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짓고 살기 시작해서,송병하의 아들 소대헌 송요화가 1714년 이곳으로 이전해 지었습니다. 그 이후 현재 11대손 까지 살아오고 있는 집으로, 송요화의 부인인 호연재 김씨는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많은 시를 남겼습니다.  조선시대 여류 문장가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꼽지만, 호연재는 이들을 뛰어넘을 만큼의 문재를 보여 134 수의 한시를 남김으로써, 여류문학사의 공백을 메꾸어 줄만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소대헌·호연재 고택이라고 합니다. 안채와 큰사랑채(소대헌작은사랑채(오숙재), 가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대헌 호연재 고택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사랑채인 소대헌이 있고 오른쪽에 작은사랑채인 오숙재가 있습니다.

큰 사랑채 소대헌

한 집안에 이렇게 사랑채가 두개나 있는데, 이런 양식은 충청지역에서는 아주 드물다고 해요. 사랑채의 처마가 좀 길면서도 전체적으로 그 모양이 아주 단아합니다.

작은사랑채 오숙재

ㄱ자 모양의 안채는 작은사랑채의 왼쪽에 나있는 중문을 지나서 출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호연재 김씨가 기거하면서, 여성이라서 펼치지 못한 꿈에 대한 울분을 삭히면서 시를 지었을 안채. 지금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이곳에 호연재 김씨가 지은 시가 모두 보관돼 있다고 합니다.

소대헌 호연재 고택의 안채


안채 뒤로는 약간 높은 위치에 가묘가 있어요. 宋氏家廟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소대헌 호연재 고택 '송씨가묘'


소대헌 호연재 고택 앞에는 자그마한 바위에 '금암(琴巖)'이라고 암각이 선명히 남아 있는데요, 금암 송몽인이 여기에 걸터앉아 거문고를 탔다고 합니다. 참 운치가 있지요?



또 동춘당 공원 한가운데는 '송씨 3세 효자정려 구허비'가 세워져 있는데요. 뜬금없이 비석이 이곳에 서있는 이유가 있어요.

원래의 효자 정려는 1861년에 후손들이 이사하면서 정문이 대화동으로 옮겨 가게 되자, 이곳에 그 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라고 하는데요. 송씨삼세 효자는 선교랑 송경창과 그의 손자인 지평 송시승, 그리고 시승의 아들인 도사 송유관을 지칭한 것이라고 해요. 이들은 모두 쌍청당 송유의 후손이며 3세가 모두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고요. 그 사적이 국가가 반포한 '삼강행실록'에 기록되었다고 설명이 돼 있네요. 조선시대에는 효행을 굉장히 중요시 한 것 같아요.



동춘당 공원에 세우진 이정표를 보니,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시직 공정려각, 송애당, 은진송씨 정려각이 있네요. 조만간 이곳들도 둘러볼 생각입니다.



이처럼 동춘당 공원은 동춘당과 동춘당 종택, 소대헌 호연재 고택 등을 통해 조선시대 양반가의 집이 어떻게 건축되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대덕구에서 조성한 '200리 로하스길' 중 약 5km 구간에 이르는 '동춘당 생애길' 중에 속해 있는 동춘당공원에서, 2019년 새봄을 맞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2019 대전광역시 소셜미디어기자 조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