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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

대전역사박물관을 거닐며 600년전 박팽년을 만나다

어릴 때 살던 곳의 옆동네에 '사육신묘'가 있었습니다. 사육신묘라는 내용만 어렴풋이 알고 있다가 국사를 배우면서 성삼문,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 사육신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게 되었지요.

초등학생이었을 때 집에 있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를 읽었는데, 성삼문, 유응부 등이 세조에게 고문 당하는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 너무도 생생해 아직도 생각납니다. 

그런데 사육신 중의 한 명인 박팽년이 회덕 사람인데요. 박팽년 탄생 600주년 기념전시가 오는 12월 17일까지 대전역사박물관 3층 전시실에서 열립니다. 



"꿈 속에서 도원을 거닐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뒷 모습이 담긴 이 모습은 박팽년이겠지요? 단순한데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그림입니다. 표현을 참 잘한 것 같습니다.

박팽년이 빛을 향해 가고 있어 검은 뒷모습만 보이는 이 그림이 마음에 쏙 들어와 기억이 생생하고 자꾸 보게됩니다.



박팽년(1417~1456)은 세종 16년 18살에 알성문과 을과에서 25명 중 9등으로 급제했고, 세종 29년 31세에 당하관 관리들이 치룬 중시에서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가 18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습니다.

대전역사박물관의 이전 전시에서도 봤지만, 조선시대 과거시헙에 급제하는 것이 정말 하늘에 별따기였다고 합니다. 4년에 한번 씩 치루는 시험에서 겨우 33명 급제했다네요. 조선시대에는 약관의 나이부터 관리가 되었는 줄 알았는데, 몇몇 천재를 빼놓고 대부분은 급제하고 관리가 되었을 때의 나이가 30대 이상인걸 보고 놀라웠습니다. 

 


박팽년은 집현전 학사로 18년 일하면서 사서 편찬, 훈민정음 창제, 세자 교육 등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관직이 자주 바뀌었을 것같은데 세종이 밀어주던 집현전에서만 18년을 학자로 근무했다니 그것도 대단합니다.

세종은 그의 천재성 만큼이나 다양한 개성을 지닌 자식을 많이 낳았는데, 첫째는 문종, 둘째는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 셋째는 시문과 글씨, 예술에 뛰어났던 안평대군입니다. 

박팽년은 안평대군과도 친분이 있었는데요. 1447년(세종29)에 안평대군이 꿈 속에 박팽년과 도원을 거니는 꿈을 꾸고 안견에게 설명하여 완성된 그림이 명작 '몽유도원도'라고 합니다. 박팽년 탄생 600주년 기념 특별전의 주제인 "꿈 속에서 도원을 거닐다"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APCS개최기념 현대미술 국제전 '헬로우 시티'전에서 선보인 탄야슐츠의 마쉬멜로처럼 환상적인 설치작품이 바로 몽유도원도에서 착안해 만든 작품이라고 했지요.



'집대성'이란, 많은 훌륭한 것을 모아서 하나의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일을 말하는데요. 박팽년은 세종이 해낸 굵직한 업적에 모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모든 면에서 뛰어나 '집대성'이란 호층으로 불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박팽년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이후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옥에 갇혔고, 처형되기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옥사할 정도로 고문이 심했을 것이라는 것이 충분이 짐작됩니다. 역적으로 몰린 후 가족은 참화를 당하고 업적도 사라졌는데 유복자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사육신 중 유일하게 대를 이었고 얼마 남지 않은 그의 흔적을 이번 특별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문정이 재위 2년만에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 세종 말년 5년 동안의 업적은 문종이 섭정을 하던 세자 시절에 한 일이라고 합니다. 5년 동안 실제적인 왕 역할을 하면서 정치 경험을 많이 쌓았는데 세종이 승하하고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강력한 동생 대군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고 합니다.



육신전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는데요. 남효온이 사육신의 전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순으로 한 사람 씩 일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박팽년은 15세기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를 존경하는 후대 학자들의 기록에 다시 등장합니다. 송시열은 박팽년 천자문 뒤에 발문을 썼고, 박팽년 유허비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박팽년 유허비각인 장절정을 세우면서 '장절정기'도 쓰는 등 박팽년과 관련된 기록을 여럿 남겼다고 합니다.

이 때는 물론 분위기는 있었겠지만 사육신이 복권되기 전인데, 송시열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대난신 후세충신"

"당대난신 후세충신"이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어느 시대나 모두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역사의 문줄기가 정도가 아닌 길을 흐르게 했을 때 해당되는 말이겠지요.  

박팽년 사후 235 년만인 1691년(숙종 17년)에 이르러서야 사육신은 정식으로 복관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박팽년의 후손을 찾아 작은 벼슬이라도 일을 할 수 있게 했다고 하는데 영조, 정조대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역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200년이 훨씬 지난 후에 국가에서 공인받은 충신이 되었네요. 

 


단종과 세조의 시대 이야기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해서 여러 소설과 영화의 주제로 여러번 등장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송강호 주연의 영화 '관상'이 있었습니다.


박팽년, 그는 어디로 갔을까요? 안평대군의 꿈속에서 함께 거닐었던 도원에서 안평대군과 함께 거닐고 있을까요? 

빛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당대에 아부하기보다 정도를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최근에도 보았지요. 정도를 벗어나 당대에 아부하다가 감옥으로 향하는 여러 사람들이요.

날씨도 겨울로 접어들어 바깥나들이가 힘들어졌죠? 집에만 있으면 무료할 수 있으니 자녀와 함께 대전역사박물관으로 가보세요.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대전역사박불관 로비에서는 무료음악회도 열린답니다. 교육과 문화예술 체험까지 모두 잡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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