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장악하는 뿌연 괴물과도 같은 미세먼지는 겨울에도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낮아진 기온으로 인해 온갖 근육이 ‘웅크림’의 연속인데, 미세먼지는 세부적인 신체기관마저 공격 하네요. 쌓인 눈 위에 또 눈이 덮이는 모양새와 다를 바 없는, 그야말로 설상가설(雪上加雪)의 계절입니다.
안개 같은 미세먼지가 시야를 흐트러뜨리며 기관지까지 위협하는 현상은 인간이 가질 보통의 권리와 의지, 욕구 등이 억제되고 검열 당하는 현재의 사회문제와도 맥을 잇는데요. 미세한 입자들이 모여 본래의 색채를 감춰버린 하늘은 마치 진실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기득권자들의 입장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스모그 수준이 되어버린 미세먼지와 전근대적인 권위, 부정이 장악한 국가의 혼란은, 극심한 ‘자본주의시대’ 산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국민의 삶을 뒤틀고 있습니다.
심신이 잔뜩 움츠러든 계절, 그 외에도 뒤틀린 자본주의에 지친 또 다른 분야의 ‘의지’를 만나고 왔는데요. 바로 미술작품입니다.
대전 시민의 문화예술 향유에 기여해온 대전 시립미술관이 신년을 맞이하여 색다르게 준비한 전시.
대전 시립미술관의 신년기획전 <아름다운 순간>은 1998년 개관 후 오랜 기간 다양한 작품으로 시민과 소통해 온 그 공감 역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아름다움’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삶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전시를 통해 만나볼 미술작품들이 지닌 고유의 삶은 날카로운 의문으로 가득하지만, 그 것 자체로도 현시대적 공감을 하기에는 아주 적절합니다.
대전 시립미술관의 신년기획전을 통해 정체를 드러낸 작품들은 ‘회화, 사진, 조각, 조형, 영상’등의 고전적이면서도 이색적인 기법을 통해 작가의 자유발상을 여과없이 표출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유혹과 소비 향락의 초점에서 벗어나, 결코 우리 삶과 동떨어지지 않는 다양한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냅니다. 그 순간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기도 하고, 주변적이죠. 또한 일상적이고 사소하면서도 관념론적인 냄새를 물씬 풍깁니다.
신년기획전 <아름다운 순간>은 지금까지 믿고 있던 ‘자본주의적 아름다움’을 부정하고 새롭게 꿈꾸는 아름다움을 향해 3가지 분야로 나뉜 기획전시를 펼칩니다. 마치 하얀 눈이 덮어버린 길 위에 새로운 발자국을 찍는 것처럼 말이에요. 아름다움의 정의와 그로 인해 꿈꾸는 이상, 나아가 아름다움을 통한 구원까지 꿈꾸는 작가들의 세계에 들어가 있노라면 함께 그 순간을 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자본시대의 아름다움은 자극적인 미를 뽐내며 영원불멸할 것처럼 보여야 팔리곤 하죠. 아름다운 것을 향한 소비와 축적이 꾸준히 반복되어도 해소되지 않는 어떤 것.
‘과연 이게 정말 아름다움일까?’
‘돈을 쓸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오래도록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
아름다움의 가치와 믿음이 자본에 의해 지배당하고, 인간은 꾸준히 아름다운 것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여기에 양민하, 김세일작가는 의문을 더하죠.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가장 부서지기 쉬운 형태의 감각이 아닐까?’
손바닥을 대면 바스라질 것만 같고 보고 있노라면 언제쯤 진짜 완성되는지 궁금증을 품게 하는 두 작가의 작품들은,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이 그리 견고하고 영속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단단한 완전체로 소비되는 제품과 동등한 시선으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언젠가는 실망하기만 할 것이라는 충고 비슷한 마음의 소리도 들리는 듯 합니다. 부서지고 결합되는 과정을 수없이 겪었을 작품들이 말합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보상적 행위가 아니라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삶 자체를 사랑하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아름다움'이 꿈꾸는 것
권여현, 윤종석, 백한승, 복진오 4명의 작가는 어떻게 아름다움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해 표현합니다. 재료나 기법은 각기 다르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깊다는 점은 서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태껏 아름답다고 느꼈던 모든 존재를 한 세계 안에 몰아넣어 행복을 꿈꾸는 유쾌한 권여현 작가.
▲인생무상(人生無常)의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기록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낭만적인 윤종석 작가.
빛이 가진 눈부신 속성은 백한승 작가 작품 속 아름다운 찰나의 순간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재료가 됩니다. 사진을 통해 굳어진 순간은 빛과 어둠의 대비가 전부이지만, 그 강렬함에 눈을 뗄 수가 없죠. 잠깐의 빛은 사진으로 인해 꺼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되어 남았지만, 실제로 그 순간이 지나 빛이 꺼졌을 어두운 공간에는 서늘함이 있습니다. 까만 세계에서 빛의 크고 작은 조각을 담아낸 사진작품에서는, 본디 컴컴한 공간의 서늘함까지도 담아내고 있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기억의 형상을 표현한 복진오 작가의 작품이 쓰인 주재료는 가늘게 생긴 금속선입니다. 본디 아름다운 기억이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기 마련. 작품은 마치 아름다운 순간이 기억날 때마다 한 줄기씩 꺼내어 엮은 것처럼 불안정합니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아쉽기만 하네요. 즐거웠던 기억을 토대로 한다지만, 완전하지 않은 기억이 겨우 만들어낸 형상은 그 순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슬퍼지게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 내기 위해 애썼을 과정은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아름다움'을 통한 구원
분명 아름답지만 그 순간의 이면엔 절망도 있습니다. 이민혁 작가 작품 속 아름다움과 절망의 간극은 미세합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아름다운 순간, 분명 죽음과도 같은 절망이 아주 가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절망이 가득 찬 비극적인 순간에도 아름다운 행복이 근처에 있습니다. 아픈 현실을 살다가도 아름다운 순간이 있기에 희망을 꿈꿀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오는 이민혁 작가의 작품들을 보며 스스로를 토닥여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외에도 아름다움의 의미를 담아 4명의 감독이 옴니버스 영화로 제작한 작품도 있으니 시간을 들여 감상할 수 있는 때에 미술관을 찾는 것이 좋겠네요.
예술이 가진 공감과 치유의 능력은 잘 알려져있습니다. 예술의 보편적 능력은 한 시대의 문제적 특수성과 결합하는 순간 더 극대화됩니다. 야심차게 시작된 대전 시립미술관의 ‘신년기획전’이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효과가 벌써부터 내다보이는군요.
어쩌면, 도저히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려운 형편으로 추락한 자연과 사회현상 속 지친 시민들의 시야를 정화시켜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관람객들에게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리고자 노력하는 시간들을 선물해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정유해 신년을 맞이하여 내놓은 대전시립미술관 기획전시의 내용은 이토록 반갑고 알차게 다가오네요.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 155(만년동)
-Tel- 042)270-7370
신년기획전<아름다운 순간>
-2016.12.13. ~ 2017. 02. 19 (1, 2, 3전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