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을 맞아 윤봉길의사의 독립운동 이야기 전이 대전 한밭도서관 에서 열리고 있는데요.
어린이 여러분 꼭 보러 오세요. 전시는 3월1일 부터 17일 까지구요. 장소는 본관 1층 전시실 이예요.
윤봉길 의사의 일대기와 독립운동 과정을 알기 쉽게 그리고 자세하고 흥미진지하게 전시되어 있어서 좋아요.
▲ 대전 한밭도서관
1932년 4월 29일, 조국 광복을 위해 중국 홍커우공원에 폭탄을 던진 사람이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윤봉길 의사 입니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해 큰 결심을 했던 윤봉길 의사의 삶과 독립운동, 그 현장의 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볼 까요?
▲ 농민독본(1927)
우리말을 가르치고 농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윤봉길 의사가 직접 만든 책 (충의사 소장)
▲ 부흥원 건물 전경
윤봉길 의사가 야학회, 월진회 등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건물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책과 잡지를 읽으면서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빼앗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민족을 탄압하자 윤봉길 의사는 농민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1926년 야학당을 만들고 농촌의 부흥을 위해 부흥원, 월진회를 세워 농민조합 활동을 하였습니다.
▲ 만주를 침략하는 일본군
1929년 부흥원을 세운 윤봉길 의사는 학예회를 열고 이솝우화 '토끼와 여우'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였습니다. 이 연극은 마을 사람들을 일깨우고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일본 경찰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윤봉길 의사의 농촌운동을 심하게 감시 했습니다.
▲ 일본군의 공격으로 불타고 있는 상하이
그 당시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과 중국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만보산 사건'을 일으켜 중국에서 독립운동이 매우 어려워 졌습니다.
▲ '만주국'을 인정하는 회의 모습
일본 경찰들의 감시로 농촌운동에 한계를 느낀 윤봉길 의사는 1930년 23살 되던 해에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글을 남기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떠납니다.
▲ 윤봉길 의사의 유묵 <장부출가생불환>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 한국애국단 입단 선서식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들은 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직접 찾아가 거사에 참여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한국애국단에 가입 했습니다.
4월 29일 김구 선생과 아침 식사를 마친 윤봉길 의사는 전날 새로 산 시계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이 시계는 이제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 제 것하고 바꾸시지요.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의 낡은 시계를 차고 홍커우공원으로 향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오전 9시 30분경, 일제의 승전 기념식 1부가 시작되어 군사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이어 11시 30분경 기념식장 무대 위에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 장군들과 대표가 올라왔습니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 의사는 일본 헌병들을 제치고 무대를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 홍커우공원 행사장의 일본군 열병식
▲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는 순간 상황도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중앙 무대에 정확히 떨어졌습니다. 시라카와 대장은 다음날 죽고, 노무라 중장과 우에다 중장등 한반도와 중국 침략에 앞장선 일본인 다수가 중상을 입었습니다. 의거는 성공했지만 윤봉길 의사는 그자리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의거 소식을 들은 중국인들은 한국과 힘을 합쳐 일제에 맞서 싸우자고 다짐했습니다. 한인 학생들이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와 맞서 싸울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었습니다.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1940.9.17)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식군대인 한국광복군을 만들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군사훈련과 전투에 참여
▲ 한인 학생 특별반을 만들었던 중국 낙양군관학교의 현재 모습
의거 이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지만 중국 주요 인사들과 동포들이 임시정부를 지원하여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 윤봉길 의사 의거후 중국인들의 항일운동 시위와 포스터
윤봉길 의사의 용감한 의거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의 국민당 총제 장제스는 중국 땅에서 벌어진 한인 청년의 의로운 행동을 칭찬하며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중국군 30만 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혼자 해냈다." 라고 말하며 이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과 김구선생, 나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사기가 꺾여 욕심을 포기하고 전쟁을 멈추는 협정을 중국과 맺었습니다. 행사장에 와 있던 외국 기자들이 의거 소식을 전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윤봉길 의사 의거를 보도한 세계의 신문들
상하이에서 터진 폭탄은 세계의 관심을 불러 왔습니다. 홍커우공원에는 일제의 기념식을 취재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많이 와 있었습니다. 외국 기자들은 윤봉길 의사 의거 소식을 발빠르게 알리면서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했지요. 그리고 김구 선생의 편지와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에 대해 감탄하며 기사를 써서 널리 알렸답니다. 그래서 외국에 있는 동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냈습니다.
▲ 순국 직전 윤봉길 의사의 모습
일제는 윤봉길 의사에게 서둘러 사형선고를 내리고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일제는 총살형을 집행함으로써 윤봉길 의사에게 최대한의 보복과 응징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죽음은 우리의 독립을 앞당기고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거룩한 순국이었습니다.
▲ 순국한 윤봉길 의사
사형 당일 일본인 검찰관 네모토가 사형을 집행할 것을 알리며 윤봉길 의사에게 유언을 물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침착하고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죽음은 이미 각오한 것이다. 할 말은 없다." 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국내외 동포들이 독립의지를 다지고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끝에 1945년 8월, 마침내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암매장된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셔옴으로써 윤봉길 의사는 그토록 그리던 광복된 조국에 묻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리던 광복을 기뻐하는 사람들
▲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칭 연화지청사에서 귀국하기 전날 찍은 기념사진 (1945.11)
나라를 되찾게 되자 '임시정부유해발굴단'은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46년 3월 윤봉길 의사를 묻을때 불경을 읽었다는 각존원의 야마모토 류도라는 여승의 고백으로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 장면
▲ 1946.7.7 국민장으로 거행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의 장례식
윤봉길 의사를 화장 했다고 거짓으로 알려놓고 몰래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묻어두어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하지만 양심 있는 일본인의 고백으로 늦게나마 윤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셔올 수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는 희망과 미래가 없다고 하잖아요.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사속에서 배우고 되새겨 나라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