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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행/박물관ㆍ시설

1950년 대전역 풍경은? 대전기록관 기록으로보는 대전

 

대전기록관, 기록으로 보는 대전

 

기록 !


누군가가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역사가 될 수 없으며 역사가 없으면 현재도 없고 그리고 미래도 없습니다.

더욱이 국가 기록은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소중한 정보자원으로 국력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거울입니다.

기록의 수단으로는 그림과 문자로 시작되어 글자가 되고 지금은 사진과 전자문서로 진화되고 있습니다.

변화에 맞춰 기록관리 패러다임도 종이기록에서 전자기록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영원한 기록, 살아 있는 역사 입니다.

 

 

기록을 모아 역사를 만들고 그리고 미래를 꾸려가는 곳 바로 국가기록원입니다. 국가기록원은 세종의 대통령기록관, 성남의 서울기록관, 부산의 부산기록관, 대전의 대전기록관이 있습니다.

 

 

대전기록관은 대전, 충청, 전라, 제주지역의 기록물을 관리 하고 보전하는 곳으로 2015년 1월 6일 개관 하였는데요.

이번 ‘기록으로 보는 대전’은 기획전시로 2015년 11월 26일 부터 2016년 10월 31일 까지 전시가 됩니다.

‘기록으로 보는 대전’ 전시를 대전소셜미디어 기자단들과 함께 담아 봤습니다.

 

대전!

 

그럼 대전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 까요?

1895년 지방관제때 회덕군 산내면 대전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부터라고 하네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1년전입니다.

1949년 충남도청소재지에서 대전시로 개편되고

1989년 대전직할시로

1995년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어

1999년 지금의 둔산동 청사로 이전이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대전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1932년 이전되면서 급속히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데요.

안타까운 것은 이 시대가 일제강점기 시대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없어도 수탈의 목적으로 역이 만들어 지고 철도가 개통이 되면서 대전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1940년 대전역


해방되기 5년전인 1940년 대전역 모습입니다.

기모노를 입은 사람의 모습에서 일제강점기를 실감합니다.

방성예 소셜미디어기자가 사진을 보며 한마디 하시네요.

"보존됐으면 좋았겠다"

이국적인 모습도 모습이지만 일제 잔제의 모습도 귀감으로 삼아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증거물로 보전 되었으면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의병이 폭도가 되는 것도 일제강점기의 아픔입니다.

 

 

 

 

 

격동의 시대!

 

 1950년 대전역 앞 군인들


꿈에 그리던 해방이 되고 일반인 보다 군인과 경찰이 더 많아 보이는 대전역 광장은 전쟁의 폭풍전야의 모습 같이 긴장된 분위기가 감돕니다. 

예상되로 대전은 곧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듭니다. 6.25 전쟁이 일어 난 것이죠.

 

 

6.25 전쟁이라는 혼란속에 대한민국국회에서 대전 임시 천도에 관한 건의 문서가 눈길을 끕니다.

대전 임시 천도에 관한 건의로 시작되는 문서에는 대전이 행정의 중심, 교통의 중심, 농산물 집산지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전은 21일간 대한민국 수도였습니다.

자랑이 아닌 슬픔과 아픔이지요, 이후 수도는 부산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1960년 창문으로 승차 


 


전쟁이 끝이나고 대전은 그야 말로 격동의 시대를 맞이 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야 말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이 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 서고, 

창문으로 기차를 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아낙네 같이 말입니다. 


  경부고속도로 대전육교 공사


 1990년 대전역 귀성열차 예매

 

그리고 추억!


 

 1965년 대전 방직공장


60,70년대 모든 국민들이 치열하게 살았던 삶이 그 대로 표현된 '새마을' 노래를 아시는 지요?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길 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가꾸세


이 새마을 노래와 함께 격동의 시대를 격으며 추억을 쌓아 갔습니다.

인동에는 누에서 실을 뽑아 내는 방적공장이, 삼성동, 신탄진 에는 방직공장이 있었지요. 

지금은 그자리에 모두 반듯한 아파트가 들어 서 있지만, 

그 당시 공장에서는 일하며 공부하는 여학생들이 참으로 많았었습니다.

 

  1965년 대전 돈모공장


 

 




나는 금년에 처음 포도 맛을 보았다.

처음이라 그런지 참 맛있었다.

언니가 다 먹을 까봐 씨까지 삼키기도 했다.

포도가 시지않고 잘 익으면 많이 사 주신다고 하셨다. 

포도송이 그림과 함께 쓰여진 일기장이 추억으로 남는 기록이며 작은 역사가 되네요.


 

감동과 환희!

 

 

  1993년 대전엑스포 93 개회식 테이프 커팅


대전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환희와 감동을 선사해 준것은 '대전엑스포 93'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나라가 1893년 미국 시카고 엑스포에 참가한 이후 꼭 100년만에 개최한 국제공인 세계박람회이기 때문입니다.

온 국민이 대전엑스포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 들었지요.

강원도에서 서울에서 그리고 저 멀리 제주도에서 하루하루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엑스포 남문 광장에서 인기 있는 전시장을 먼저 보기위해 엑스포다리 위를 달리는 구름 관중은 

그야 말로 진 풍경이었습니다.


 

 

 

2002 월드컵 경기는 대전시민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네덜란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우리나라 대표팀이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모든것이 멈춰졌지요.

거리에는 차량들이 사라지고 회사는 모든 업무가 정지 되었습니다. 

모두가 빨간티를 입고 대형 전광판이 있는 곳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T.V 앞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대한민국~     짝~ 짝~ 짝~ 짝~ 짝~!

목이 터져라 왜 쳤던 구호입니다.

대전시민 모두가 아니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애국자 였지요.

물론 대전월드컵 경기장에서도 이탈리와 6강전이 벌이 지고 

박지성 선수의 그림같은 슛이 이탈리아 골문을 흔들어 이겼지요.

대전시내는 대한민국~   짝~ 짝~ 짝~ 짝~ 짝~! 

구호와 함께 경적을 울리는 차량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꽉 메워 졌지만 모두가 기쁨에 찬 얼굴들 이었습니다.

너무 감격에 겨워 울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었습니다.




야구로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한 박찬호 선수도 우리에게 감동이었으며 희망이었습니다.

대부분 경기가 점심 시간대에 열려 박찬호 선수의 경기를 보고 오후 근무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던지는 공 하나에 희비가 엇 갈려 즐거운 오후 근무가 되기도 하고 안타까운 오후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새롭게 발돋음 하며!

 

  2008년 중앙데파트 철거 장면


위 사진은 대전의 목척교 위에 지어져 있던 중앙데파트 철거 발파 모습입니다.

대전의 목척교에는 중앙데파트와 홍명상가라는 두 건물이 있었는데 대전의 상징이면서 대표 건물이었습니다.

지금의 50대 이후 세대는 이 곳에서의 추억은 모두 하나씩 같고 있는 곳입니다.

한 예로 홍명상가에는 일명 고고장이 있었는데 대전의 젊은이 들은 모두 이곳에서

고고춤을 추며 젊음을 불사르던 명소 였습니다.

그런 명소가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원도심이라는 공동화 현상앞에 어쩔수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원도심의 재창조를 기대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예전 신혼 여행지로 유명한 유성 온천 이야기좀 해주세요.

대전을 노래한 옛 노래는 무엇이 있지요?

추억의 입학식과 졸업 사진이 그립습니다.

대덕연구단지 조성 스토리가 알고 싶습니다.

행정 중심지라는 정부대전청사 건설 장면이 궁금합니다.

궁금하다구요. 그 답은 '기록으로 보는 대전' 속에 있습니다.

 

 

대전기록관에서 기획전시중인 '기록으로 보는 대전'의 과거 속에는 다양한 삶을 이끌어 온 

대전 사람들의 모습이 아련히 스며 있고, 안타까운 흔적이며,즐겁고 행복한 시절이였으며, 

소망이며 희망이었고 , 환희와  감동의 순간들이었습니다.

대전기록관으로 오십시오!

기록속에 살아 있는 대전의 역사를 여러분들과 같이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