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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행/역사유적

대전가볼만한곳 ㅣ 단재 신채호 생가



대전에서 태어난 가장 중요한 근현대 인물 중에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있습니다.

저만 무심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대전에서 중요 인물을 '부각'시키는데 좀 소홀히 한 것일까요?


어쨌든 저도 무심하게도 대전에 이사온지 22년이나 되었는데

항상 가봐야지 가봐야지~~하고 생각만 하다가

이번 2015년의 봄날 어귀에 마음을 먹고 단재 신채호 생가를 찾았습니다.


멀지도 않은 길인데 어찌 그리 오랜 시간만에 찾았는지

단재 신채호 선생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제가 갔던 날은 바람이 적어서,

하늘이 시리게 푸르렀던 날임에도 불구하고 싸~~하게 시린 느낌보다는

 햇살이 조금 더 푸근하게 느껴지는 날이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바로 옆에 단재헌이라는 관리동이 있는데,

그럴싸한 이름과 외모를 하고 있지만 문이 잠겨 있고 인적은 없네요.

마치 한동안 비워져있는 것과 같은 분위기인데..

그런데 밖에 달린 전기 계량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관리동인 단재헌 앞에 [단재 신채호 선생 유허비]가 있고,

 그 앞으로 작은 개울을 건너가는 무지개 다리가 있습니다.


이쯤에서 사진 찍으면서 보고 있는데 다리 건너에서

목줄을 하지 않은 개 두 마리가 달려나와

저를 향하여 물듯이 달려들면서 멍멍 짖었습니다.


옆에 주인인 듯 보이는 여자가 있길래 개들을 말릴 줄 알았는데 그러지를 않더군요.

본 기자도 평소엔 한없이 사람이 좋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욱하는 한 성질하는 터라

개 주인 들으라고 혼잣말하듯 "한 번만 더 달려 들어봐. 뻥 차버릴테니"라고 했더니~^^

개 주인이 저를 한 번 쓱 쳐다보더니 개들을 몰고 다른 쪽으로 갔습니다.


저는 평소에 '개는 개답게 사람은 사람답게'란 기본 믿음이 있는터라,

'사람을 우습게 아는 개'라거나 '개 만도 못한 인간'은 혼나야 한다고 생각해서~ㅋㅎㅎㅎ


 


다리를 건너면 생가로 향하는 길목에 이렇게

풀을 엮어 머리에 이고 있는 정자가 하나 서 있습니다.


당시에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가를 찾아 온 사람들의

쉼터로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정자는 밖에서도 보고 안에서도 봐야 합니다.

정자는 사람이 그 안에 앉아서 정자 기둥으로 테두리가 쳐진

액자 속의 자연이란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드디어 생가에 왔습니다. 이제야 찾아 왔다는 사실에 영 죄송스러운데,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고 안내판도 단정하여 마음이 좀 덜 불편하였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80년에 이 곳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8살 때까지 사셨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할아버지가 계시는 충북 청원으로 이사하였다고 하니,


그래서 청원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기념관, 사당, 무덤이 조성되어 있었군요.

검색을 해보니 기념관이 있는 곳에서는 인문학 강좌 등

단재 선생에 관한 교육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네요.





정면 왼쪽의 안방에서 단재 선생의 어머니가 일을 하셨을 것이고,

오른 쪽으로 돌아가면 단재 선생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 인형이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白頭山途中(백두산도중)      申采浩(신채호)

                

人生四十太支離(인생사십태지리)  인생 사십 년이 너무도 지리하고

 貧病相隨暫不移(빈병상수잠불이)  가난과 병은 잠시도 떨어지질 않네

最恨水窮山盡處(최한수궁산진처)  한스러운 것은 산도 물도 다한 곳에서

任情歌曲亦難爲(임정가곡역난위)  마음대로 노래 조차 부를 수 없다는 사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중국 망명 시절 백두산을 유람하고 쓴 시라고 합니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 막막한 심정으로 쓴 한시라고 하는데,

충북 청주에 있는 단재기념관에서는 단재 선생님이 쓴 한시를 여러 편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집 뒷편으로는 장독대와 함께 누구의 무덤인지 표시되어 있지 않은 무덤 2기가 있습니다.




한옥 벽의 분할면을 보면 그 비율이나 리듬감에 한옥을 감상하는 느낌이 더욱 좋습니다.


면을 분할하여 경쾌한 색을 입힌 추상작품으로 유명한 추상회화 작가 몬드리안보다 앞선

흑백 추상회화라고 할까요~^^ 





 



단재 신채호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 어수선한 국제 정세 속의

대한제국에서 애국계몽운동, 신민회 활동 등을 하다가 1910년, 대한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지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동아시아 평화운동을 하셨고

1929년에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1936년에 대련의 여순 감옥(중국 다롄시 뤼순)에 수감되었는데 

뇌일혈, 동상, 영양실조,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쓰러져 사흘 동안 방치되다

감옥 안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단재 선생이 29세이던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교과서를 비판하면서 왕조의 입장이 아닌 민족 중심의 역사 서술로

진보적인 논설로 평가받고 있는데, 후에 발표된 '조선상고사'로 완성되었다고 본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본이 만든 호적 체계를 거부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국적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2009년에야 겨우 대한민국으로 국적 회복이 되었다고 합니다.


광복은 하였으되 청산하지 못한 친일잔재의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큰 악영항을 미치고 있고

 21세기를 앞서 나가려고 하는 대한민국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근현대사를 냉철하게 잘 배워야 하는데, 일본처럼 지나친 국수주의가아닌

논리적인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를 차분하게 돌아보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지만 

21세기, 22세기로 향해 저력을 모아 성큼 성장할 것이고, 

바로 그런 것이 민족 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저 세상에서도 바라는 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장소 :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 229번길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