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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전시ㆍ강연

대전전시 | 한밭도서관, 독립운동가 사진전



대전 중구 문화동에 위치한 한밭도서관 1층 전시실에서

3월 29일까지 '독립운동가 사진전'이 열립니다.




도서관 정면에 '시민을 행복하게. 대전을 살맛나게'라는 구호가 적혀있습니다.

'대전을 살맛나게'라는 말이 왜 이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지요.




1층 전시실입니다.




대준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조명해 보는 전시입니다.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1월부터 12월까지 선정한 12명의 독립운동가를


한 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는 뜻깊은 전시랍니다.

 



전시실 내부에는 넓어서

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1월의 독립운동가 김도현

 의병활동과 자결로 일제에 맞선 의병장입니다.


김도현 선생은 한말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1896년 영양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북∙강원지역의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하였고

1905년 상소투쟁과 더불어 격문을 지어 의병 궐기를 촉구하였으며

1914년 국권회복의 염원을 안고 동해 바다에서 투신 순국한 인물입니다.




2월의 독립운동가 구연영

계몽운동·국채보상운동으로 조국독립을 외쳤던 한말의 독립운동가입니다.


당시 일제의 만행에 많은 조선의 국민들이 분노하여 전국각지에서 의병을 봉기하여 항일 투쟁을 펼치면서

의병을 일으킨뒤 많은 전투를 겪은 선생은 이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합니다.


일진회 규탄 성토회 및 투쟁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선생은

일진회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아들 구정서와 함께 부자가 총살을 당하고 맙니다. 




3월의 독립운도가 전덕기

구국의 생기를 불어넣은 선각자입니다.


일제강점기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신민회 창립 활동을 통해 항일구국운동을 선도하였던 분입니다.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을사늑약 반대, 일제의 군용지 매수반대, 일진회 등

친일어용단체 반대 투쟁 등의 반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이를 통해 북간도와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확보 사업 등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105인 사건에 혐의를 받고 일제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게 됩니다.

이후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고문으로 받은 병을 회복하지 못하고

39살이란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4월의 독립운동가 연병호 독립운동 세력 통합에 헌신하였답니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연계시켜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했던 분인데

1937년 초 친일파인 상해거류조선인회장 저격사건으로 상해에서 체포되고 맙니다.

 선생은 이 일로 징역 8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5월의 독립운동가 방순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해 노력한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반제국주의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일제의 치한유지법 발효로 감시 대상이 되어

중국으로 망명한 방순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일원으로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였습니다.




6월의 독립운동가 백초월


승려 신분으로 30대 초반에 큰스님의 반열에 오른 지식인이었던 선생은

독립운동의 역량을 한마음으로 결집하고자

진관사를 비롯하여 전국 사찰을 돌며 항일이념인 일심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선생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활약한 한용운과 백용성이 일제에 체포되자

승려독립선언서와 의용승군제를 추진하면서 불교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9년 상해임시정부와 독립군에게 조달할 군자금 및 용산역 ‘대한독립만세’ 격문 작성을 주도하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였습니다.



 

7월의 독립운동가 최중호 인재양성과 민족교육을 통해 일제와 싸웠던 분입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 상해로 망명하였고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와 어려움에 처한 한인동포들을 지원했습니다.


김구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얻은 폐병이 악화되어 1934년 순국하였습니다




8월의 독립운동가 베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항일 언론활동을 펼친 영국언론인입니다.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영국「데일리크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던 베델선생은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던 시기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해 항일언론 활동을 벌였습니다.




9월의 독립운동가 나월환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 및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1912년 10월 14일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나월환 선생은 상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헌병학교 및 군관학교 교수를 거쳐 중국군 헌병장교로 복무하였습니다.


이후 1939년 11월에 아나키즘에 참여한 인사들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여 

일본군 점령지역 내 한인청년들을 대상 으로 선전∙심리전을 전개하였으며 

중국군민을 대상으로 연극공연을 하여 한∙중 공동 항일 유대를 강화하였습니다.




 10월의 독립운동가 한징

조선어사전편찬위원 및 조선어 표준어 사전위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1886년 2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난 한징선생은 평생 우리말과 글을 지켰는데

1927년 계명 구락부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했으나

사전편찬이 중단되면서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활동에 합류하였습니다.


이후 한징선생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이윤재 등과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 조선어학회 위원으로 가입하여

1934년에 조선어학회가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일제는 조선어말살정책을 펼치며 우리말과 글을 위협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조선어학회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였습니다. 선생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옥고 중 일제의 갖은 고문에 의해 1944년 옥중 순국하였습니다.




11월의 독립운동가 이경채


항일격문을 살포하여 광주고보생 동맹휴학의 도화선을 열고

이후 중국 육군으로 항일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항일학생운동과 인재양성에 헌신하였습니다.




12월 독립운동가 오면직


맹혈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 및 밀정처단 활동을 펼치다 사형 순국한 선생입니다.


김구의 비서로 활동한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1936년 한국맹혈단을 조직하여

친일파 처단 및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1938년 사형 순국하였습니다.




전시실 중앙에는 각종 도서가 진열되어 있어서

책을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의 삶을 통해

나라의 중요성과 그분들의 업적을 기릴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