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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

명학소의 북소리 - 탄방동 망이 망소이의 민중봉기 기념탑


그래  나  무식하다. 
문화유적지를 찾다 보면
예전 지명 이름이 현재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나올 때가 종종 있다.


내 생각엔
옛날 그 때 당시의 지명이 매우 중요하니 그 지명과
현재 지명이 바뀌었다면  괄호열고 현재 지명을 같이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된다.

내가 차마 말하기 정말 어려운 창피한 일이 있거든!!!
그래서 작년? (재작년?) 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예전 지명과 현재 지명이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2년 전 가을
전주 전동 성당에서 문화해설사가 윤지충에 대해 잠깐 얘기한 적이 있다.
전라도 진산 사람이라 하기에 진산이 어디에 있느냐 물으니 충청도 금산의 진산 이란다.
나도 몰래 고개 갸웃하며 에~엥? 했는데 아마 속으로 "뭐야- 저 태도" 하고 욕했지- 싶다.


배울 때 전라도로 배웠던 것 같아 지금껏 전라도 까지만 알고 있었는데
진산 이란 소리에 가까이 있던 나는 무심코 물었었고 뜻밖의 대답에 내가 멍~~~ 해 진거지.
옛날에는 금산이 전라도 였으니까 전라도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다만,
나처럼 멍~~ 한 사람은 지금의 전라도에서 진산을 찾지 않을까?


나만.....   그러나?????  

몇 년전


탄방동 도산서원 뒤에 조그마한  남선공원이 있다.


봉사활동 하러 오라기에 갔다가 기념탑을 봤는데
'명학소  망이. 망소이의 민중봉기 기념탑'이라 되어있�.
망이 망소이라면 공주로 알기에 왜 여기 대전에 이게 있지?? 
궁금했지만 사실 공원마다 이러저러한 기념탑이야 많이 있기에 그러려니 하였지.


그러다 공주 시청에 갈 일도 있고 그 전에 여러가지 자료 좀 구하느라 전화하면서 갑자기 생각나기에
어떠한 것과 망이 망소이에 대한 자료도 부탁 했는데 망이 망소이는 모르는 일 이란다.


"무슨 말씀을요.  분명 공주에 그 자료가 있을텐데....  제가 찾다 찾다 없어서 부탁 드리는 거예요."


하면서 내가 아는대로 줄줄 말해도 전혀 모른단다.


전화를 바꾸고 바꾸고 바꿔서 어느 분이 말씀 하시길


"옛날에는 그 지역이 공주 관할 이었지만 지금은 대전 입니다.
공주에 없는 자료라면 분명  대전에 있을테니 대전에서 한 번 알아 보십시요."

으아아아아악~~~~~


그래서 나 이제껏 입 꾹 다물고 살지. 


우리 아들들

"엄마, 우리 엄마라고 안했지???   킬킬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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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m 높이인 이 기념탑은
이 지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뜻하는 3개의 탑 몸체와
북의 모습을 딴 꼭대기 장식물,
탑 주변에 민중군 동상을 세워
명학소 민중봉기의 참 뜻과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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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 망소이(亡伊·亡所伊)의 난

고려 명종 때의 천민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 즉 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지구일대를 중심으로 신분제의 타파를 목적으로 봉기하였는바 이름하여 「명학소의 난」이라 한다.

고려무신집권기에는 무신 상호간 권력다툼을 이용하여 각지에서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한 하층민들의 반항, 즉 민란이 반발하였다.

서기 1176년 고려 명종6년 정월에 명학소 주민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는 자칭(自稱)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하고 민란을 일으켜서 공주지방을 함락시켰다. 이때 조정에서 지후(紙侯) 채원부와 낭장(郎將) 박강수등을 파견하여 적들을 달랬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2월에 장사(壯士) 3천군을 모집하여 대장군  정황재 장군 장박인 등으로 토벌(討伐)하였다.


고려사절요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明宗六年 春正月…… 公州 鳴鶴所民 亡伊 亡所伊 等嘯聚黨與自稱 山行兵馬使 功陷公州 遺祇侯 蔡元富 郎將朴剿壽 等宣諭賊 不從 二月 召募壯士三千 命大將軍 丁黃載 將軍 張博仁 等 討之……


라고 하였다.

한 때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의 회유무책(懷柔撫策)으로 그 향리(鄕里)인 명학소를 승격시켜 충순현(忠順縣)이라 하고 현령(縣令) 현위(縣尉)를 보내어 그곳 주민을 위무(慰撫 : 위로(慰勞)하여 어루만짐 )케 하였으나 반도(叛徒 : 반란(叛亂)을 꾀하거나 거기에 참여(參與)한 무리)는 듣지 않아 다시 무력토벌하여 1177년(고려 명종7년) 정유(丁酉) 정월(正月)에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가 항복하자 창고의 곡식을 하사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 김덕강에게 명(命)하여 그 고향으로 압송시켰다

망이 망소이의 난은 천민집단의 신분해방운동과 농민반란의 두 가지 성격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난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고려사회에 신분질서를 타파하려는 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선구적인 의미가 인정되며 실제로 이후 천민집단의 소멸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평가된다.

《자료 : 大田市史,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權寧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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