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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스포츠

"2011년 한화이글스를 말하다" <12> - 인간투혼의 승리를 몸으로 보여준 "송창식"




2011년 8월 21일 깊은 밤의 함성이 울려퍼지고 있는 잠실벌 두산대 한화의 경기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9회 마운드에는 한화의 수호신 바티스타가 올라서 있다. 싶게만 끝날줄 알았던 5:1의 경기가 9회말 한상훈의 실책과 김현수의 볼넷으로 투아웃 주자 1.2루 상황 타석에는 4번타자 김동주가 나와있는 상황인 것 이다. 한방이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바티스타의 1구가 2구, 3구가 모두 볼로 기록되면서 모두가 숨막히게 처다보는 순간 가운데를 꼿아넣는 바티스타의 스트라이크 그리고 또 한번의 스트라이크 이제 마지막 5구째 김동주의 배트가 힘있게 돌아간다. 그리고 2루수가 콜을 외치며 잡는 순간 감격의 물결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연신 카메라는 벤치의 한 투수에게 수 많은 플레시를 터트리며 몰려든다. 한국시리즈 우승도 아닌데 이 무슨 일이기에 ......
그렇다 그날의 주인공은 정확히 2573일만에 선발승을 거둔 송창식이었던 것이다.

송창식을 말한다
청주출신인 송창식은 유소년시절 야구로서는 그야말로 인정을 받던 기대주였다. 청주 서원초등학교와 청주 세광중, 세광고를 거치면서 각광받는 기대주로 성장했던 것 특히나 2003년에는 청소년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2003년 아시아 청소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컵을 거머질만큼 멋진 활약을 보인 것이다. 2003년 아시아 청소년 야구선수권 우승당시의 멤버만 보면 우리에게 지금 낮익은 선수들이 많이 보인다. 일단 그 당시에도 강민호가 포수로, 이용규, 정의윤도 있고 내야수에는 박석민이 있었던 것 그중에 한면의 투수가 바로 송창식이었던 것 이다. 그렇게 잘나가던 송창식이 한화에 입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처럼 그는 그 이듬에 2004년 고교졸업과 동시에 2004년 신인드래프트 2차 1순위로 한화의 유니폼을 입게 된 것 이다. 입단하자마자 송창식의 투구는 바로 프로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2004년 26경기에 등판해서 8승7패 방어율 5,13의 기록을 보이며 단번에 신인왕후보로 거론될 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 거기에 신인으로서 1경기 완투승을 기록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그가 얼마나 위력적인 투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 일 것 이다. 이렇게 각광을 받던 송창식 이었기에 그 시절 한화의 차기 에이스로 송창식을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 이다. 하지만 다음에 기다릴 힘든 역경이 있을줄을 과연 누가 알았을까?


힘든 버거씨병과의 사투
그런 그의 힘든 과정은 서막은 2004년 시즌이 끝난 다음부터였다. 투수에게 생명같은 팔꿈치 부상이 발생된 것 그렇게 힘들게 시작된 재활의 터널은 그를 비범한 선수에서 이제는 마운드를 올라서기 힘든 선수로 탈바꿈을 시켜버렸고 2006년에는 고작 17인닝밖에 못던지는 투수로 변하게 만든 것 이다. 그런 어려운 시간의 흐름속에서도 계속해서 재기를 꿈꾸던 그에게 지울수 없는 병마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2007년말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진다는 것은 느끼고 병원을 찾게 된 것 이다. 검사결과 는 가히 충격적인 병명 정확히 말해서 "폐쇄성 혈전 관절염" 일명 "버거씨 병"으로 판정을 받게 된 것 이다.("버거씨 병"이란? 일종의 자가면역체계가 면역을 방어하는 것이 아닌 본인을 공격하게 하는 병으로써 정확한 원인은 발혀지지 않고 있지만 흡연을 많이 하는 40대 남자들에게서 많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는 병으로 심할경우 피부괴사가 일어날정도로 무서운 병으로 알려져 있다. 더군다나 예방도 금연으로만 알려질 만큼 희귀병의 성격을 갖고 있는 병인 것 이다) 결국 2008년 4월 한화에서 임의탈퇴를 한 송창식은 이후 모교인 세광고에서 코치 생활을 하며 잃어버린 감각을 찾기 위한 재활을 시작한 것 이다. 팔꿈치부상에 따른 재활과 투수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병을 맞은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아마도 죽음과도 같은 순간이 아니었을까? 거기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 일반인이라면 아마도 다른 직업을 찾아보던지 아니면 아마도 모든 것을 놓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송창식은 대단했다. 수없이 많은 노력과 인내의 시간을 묵묵히 이겨내면서 잃어버린 기적같은 감각을 다시찾기 시작한 것 이다. 그렇게 재활의 터널을 벗어나기 시작한 송창식은 2010년 3월 다시 한화이글스에 재입단 테스트를 받고 연봉 3,000만원에 재계약을 한 것 이다. 정확히 2년을 기다린 결과였던 것 이다.


2011년 시작과 함께 날아오르다
그렇게 시작된 2011년 한화의 무너진 마운드를 책임질수 있는 기회가 송창식에게 온 것 이다. 어떻게보면 모든 기적같은 매직이 다시한번 일어나는 순간이 온 것 이다. 하지만 첫번째 등판에서 그가 갖고 있었던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11년 4월 6일에서 1 1/3 11타자를 상대하면서 5실점으로 무너진것, 그날의 투구는 제구도 스피드도 하다못해 투구타이밍까지 모든것을 놓고 있었다. 그야말로 관중들의 야유를 머금고 돌아서야했던 것 그렇게 시작된 실패한 등판이 4월12일 등판에서도 또 다시 되풀이되면서 위기를 맡은 것 하지만 그렇게 물러날 송창식은 아니었다. 그 이후부터 선발에서는 밀려났지만 계투진으로 합류하면서 서서히 경기감각을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 이다. 그리고 결국 8월21일은 감격의 선발승까지 만들어내면서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막판 10월에는 2승을 추가하면서 4승3패 방어률6.34로 시즌을 마무리 한 것 이다.


달라진 송창식 그의 성공여부는 올해에 달렸다
작년시즌 송창식의 가능성은 분명히 찾은 한해였을 것 이다. 일단 2004년 만큼의 140km을 웃도는 직구의 위력을 보여주기는 부족하지만 다양한 변화구와 볼끝의 살아움직임의 가능성을 찾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분명히 선발로서의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는 아직은 어렵겠지만 중간계투로서 롱릴리프로서 그는 충분한 모습을 각인시켜주었기에 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이제 송신영의 가세로 좀더 막강해질 한화의 마운드 상황으로 볼때 과연 송창식이 가질수 있는 모습이 어떨지는 또 한번 깊은 숨을 쉬게 만든다. 그 만큼의 노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하지만 기적을 만든 사나이이기에 송창식이 만들어낸 2012년은 또 한번의 기적을 팬들에게 선사하지 않을까 한다.
작년의 일구대상에서 불굴의 재기상을 수상한 이대수의 수상으로 강동우, 최진행, 이대수까지 3연속의 모습을 보였던 한화, 아마도 올해에는 송창식이 또 한번의 수상으로 팬들앞에 우뚝서기를 한화의 팬들은 2012년 그에게 바라고 있을 것 이다.

                                                                                                                                                                                                    
                                                                                                                                                                                                  @ 한화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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