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르게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발길을 쉬지 말라. 그리한다면 비록 한 번 걷고 아홉 번 쉰다 하더라도 만나볼 날이 있을 터이니,
그대로 계속 올라와서 목마르게 기다리는 나의 부름에 부응하라!!
효종은 호란의 치욕을 깨끗이 씻고자 김집과 김익희를 통해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를 추천받아 그들을 부르게 됩니다.
위의 문서는
대전 동구 가양동 우암사적공원에 있는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효종이 우암 송시열을 부르는 유지입니다.
몇 년 전 맨 처음 유물관에 들어가니
신식 밍크옷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왜 현대옷이 유물관에 있는지 설명문을 읽어봐도 잘 이해가 가질 않고 그저 어울리지 않는 것만 머리에 넣었지요. (내가 좀 띠일 하거던요)
송시열과 송준길의 많은 자료를 읽다가 그제서야 이해가 갔지만
현대화된 초구는 거슬리긴 마찮가지랍니다.
도록을 읽다보니 청주 박물관에서 전시되었던 초구의 실제 사진과 초구안에 기록해둔 글씨를 사진으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시된 초구와는 많이 다르지만
그래서 다시 전시할 때 까지는 실제 옷을 볼 수 없음이 참으로 안타깝지만
초구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답니다.
1658년 효종 9년 송시열은 효종으로부터 초구를 하사 받습니다.
도록에는 효종실록과 송자대전을 인용하여 효종이 초구를 하사하고 송시열이 사양하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 초구는 효종의 북벌 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효종은 초구를 송시열에게 하사하며
이 초구를 입고 함께 추운 요동지방을 정벌하러 가자고 당부를 합니다.
송시열은 효종과 주고 받았던 말을 초구안에 기록하였고,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 초구를 다시는 입어 보지도 못하고 상자속에 보관합니다.
1679년 (숙종 5) 귀양살이 중에 맞이한 효종의 기일에는 한없이 사모하는 소회를 옛날 초구 안에 기록하였던 곳의 왼쪽에 썼으며 이어 갖옷의 안찝으로 넣은 명주로 딴 옷을 만들어 죽은 뒤에 쓰도록 합니다.
(난 개인적으로 저렇게 양쪽면에 사진을 싣는 것은 싫어합니다.
사진의 중심이 되는 가운데 부분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송시열이 초구안에 기록해 둔 글입니다.
현재는 마멸이 심해서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지만,
연보(年譜)등의 기록을 통해 초구를 하사받을 당시 효종과 송시열이 주고 받았던 대화와 1679년 효종의 기일이 되어 그 소회를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송시열이 초구를 하사 받은 그 이듬해에 작성해 둔 발문의 초고본입니다.
효종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전에 기록해 둔 것입니다.
지난해 겨울에 주상께서 이 초구를 하사하시었다.
신이 걸맞지 않다는 이유로 외람되이 사양하였더니 소비의 말씀이 간절하였으므로
감히 다시 더 뜻을 아뢸 수가 없었다.
............... (중략)
기해년 4월 일, 신 송시열이 이마를 조아려 절하고 삼가 기록한다.
우암사적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복원된 초구입니다.
350년의 세월을 우리가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겠지요??
대개 전시장을 둘러 볼 때는 겉에 보이는 모습만 보고 휘리릭 지나가기 일쑤입니다.
요즘엔 많은 자료들도 있고
특히 우암사적공원에는 항시 문화해설사가 상주하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요.
손에 자료집 들고 카메라 셔터 누르며 문화해설사와 멋진 문화데이트 한번 해 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