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란 이름은 1940년경
미술사학자이자 미학자였던 고유섭선생이 ‘분장회청사기’라고
이름을 붙인데서 비롯하였다.
분청사기는 이 분장회청사기의 약칭으로 태토위에 백토(장석의 돌가루)로
만든 유약으로 분장하여 만들어진 그릇이다.
분청사기가 만들어진 시기는
고려 말의 정치 ,경제, 사회, 국방, 외교가 혼란해지자
강진을 중심으로 한 도자공예는 그 정형을 잃어 갔고,
국가의 배려와 보호를 받지 못한 기술자들은 전국으로
자신들의 살 길을 찾아 흩어진다.
이러한 도공들은 정형화된 상감청자의
양식상의 퇴화 과정을 거치면서
초기분청사기가 태동하던
1360~1420년경이 불안한 사회상 속에서
조선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면
중기는 1420~1480년경으로 분청사기의
다양한 기법으로 꽃을 피우던 시기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시기는 조선왕조 중
민족문화가 융성하게 번창시키고 완성시킨
세종대왕이 치세를 하던 시기이다.
이때의 도자공예에서는
분청사기가 다양한 기법과 다양한 발전을 보여
상감, 인화, 박지, 음각 등의 양상을 보인다.
후기분청사기는
1480~1540년경으로 점차 쇠퇴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상감과 인화 기법은 쇠퇴해 가며
계룡산 기슭 학봉리 일대에서 제작된 철화 기법과 같은
개성이 강한 지방양식으로 발전해 간다.
이 시기에는 서서히 귀얄 기법이 사라지며
서서히 백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시회에 오신분께 분청사기에 대하여 설명하고 계신다.
함께 전시회를 열고 있는 정순자 선생의 작품설명.
말기는 1540~1600년경으로 그 후 조선의 분청사기는
왜란으로 인한 도공과 가마의 상실, 시대적 변화를 거치며
자연 발생했던 것처럼 백자에 일부 흡수 되면서 소멸되고 만다.
또한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워지는 임진왜란을 통해
수 많은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으로 끌고 갔고
찻사발과 많은 도자기를 약탈해 갔다.
이때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과
철화기법은 백토를 분장한 후 철분이 많이 포함된
안료(물감)을 사용하여 붓으로 문양을 그려낸 기법이다.
이때 그려지는 문양은 도식적인 것, 추상적인 것,
회화적인 것, 익살스러운 것 등 다양하여
서민들의 생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기법은 주로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충남 공주반포면의 계룡산 기슭에서 주로 제작되어
일명 ‘ 계룡산 분청사기’라고도 한다.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1887~1979)는
미국에 있는 유명한 도자기학교인
알프레드 도자기학교의 기념 강의에서
“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이미 다했다”
고 말했다. 그 만큼 분청사기는 현대적인 감각이 넘치는 도자기인 것이다.
우리민족의 정서인 역동성과 해학적 사고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자 했던
분청사기를 통하여 현대도예의 위상을 높이기를 바래본다.
참고자료 : 「분청사기」-강경숙- , 「알기쉬운 한국도자사 」- 유홍준, 윤용이-)
전시 기간 : 2010.12.14~ 18
전시장소 : 유성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