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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행/역사유적

대전 동구 가양동 박팽년 유허비를 찾아서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메라. 야광(夜光) 명월(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 이시랴.” 

이 말을 남긴 사람이 대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대전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회덕현에서는 여러 인물이 나왔는데요. 보통은 은진 송 씨 계열만 많이 생각하지만 회덕현 흥농촌 왕대 벌(동구 가양동)에 태어난 사육신 박팽년도 있었습니다.


차들이 주차가 되어 있어서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는 곳입니다. 박팽년은 평소에 가야금 타기(필자와 비슷한 취향)를 좋아해서 스스로의 호를 취금헌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풍류를 즐길 줄 알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지킬 것은 꼭 지켰던 사람입니다.

박팽년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위해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거사를 준비하다가 실패하고 옥중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숙종 때 명예가 회복된 후에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됐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등 여러 업적을 남긴 박팽년은 집현전 학자 중 경술과 문장·필법이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란 칭호를 받았다는 것을 보면 모든 것에 능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대와 이념을 떠나 그의 절의정신은 고귀한 가치로 평가받고 있는데 옛 사람인 자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진 이를 어진 이로 대하기를 마치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고, 부모를 섬길 때는 자신의 힘을 다할 수 있으며, 임금을 섬길 때는 자신의 몸을 다 바칠 수 있고, 벗과 사귈 때는 언행에 믿음이 있다면, 비록 배운 게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박팽년은 1434년 과거에 급제한 뒤 정 9품 정자에 제수, 단종 즉위년인 1452년까지 18년 간 집현전에서 일했습니다. 1444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언문(諺文) 운회(韻會) 번역 작업을 시작으로 1446년 주해(註解), 그리고 해석과 범례 서술에 앞장서서 일했다고 합니다.

박팽년이 사형되기 전 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는 안타까운 마음에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마음을 돌려 나에게로 돌아와서 이번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 다고 숨긴다면 살려주리라” 하였지만 박팽년은 마음속이 불편하여 이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며 자신의 길을 택했습니다.


사육신중에 한 명이 대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참 의미가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지금 모두 사용하는 한글을 만드는 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까지 했습니다. 지금의 박팽년 유허비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