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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전시ㆍ강연

박팽년 탄신 600주년 기념 특별전! 꿈속에서 도원을 거닐다

 

쟁쟁한 선비들 사이에서 글과 글씨, 경술이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 불렸다면, 얼마나 뛰어난 지식인이었을까요?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거니는 꿈 속에까지 불러내어 새 나라 조선을 함께 그려보고자 했다면,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을까요?

 

그는 후일 충절의 표상이 되는 박팽년입니다.

 

 

 

 

박팽년 선생은 회덕에서 태어난 우리 대전의 자랑스런 인물이기도 하답니다. 올해로 선생의 탄신 600주년을 맞아, 대전시립박물관 본관인 대전역사박물관에서 특별전 <꿈 속에서 桃源(도원)을 거닐다>가 오는 12월 17일까지 열립니다.

 

 

 

 

대전역사박물관 3층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니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그리게 했다는 '몽유도원도'가 맞아줍니다.

 

전시실 안에 들어서면, 또 다른 느낌의 '몽유도원도'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아트로 되살아나 나비가 팔랑거리고 폭포가 쏟아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이 전시가 마련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이 있었을지 짐작이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박물관이 있다는 것이 새삼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꿈 속에서 도원을 거닐다> 기념 특별전은 박팽년 선생의 집안과 업적, 계유정난과 죽음, 그 이후의 이야기 등 모두 일곱 가지 주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박팽년 선생하면, '집현전 학자이자 사육신 중 한 분'이라는 것만 알고 있던 제게는 조선시대 대전의 역사까지 더듬어 볼 수 있는 귀한 자리였습니다.

 

 

 

 

1. 박팽년, 그가 살던 회덕

 

 

 

 

선생은 지금의 동구 가양동에서 나고 자랐다는데요. 단종복위운동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200여 년이 흐른 후에 세워진 '평양 박선생 유허비(대전 동구 우암로326번길 28 소재/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를 통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유허비는 선생의 자취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후세에 기리기리 전하고자, 송시열 선생이 글을 짓고 송준길 선생이 글씨를 썼다는데요. 박팽년 선생의 집안 내력과 출생, 화려했던 관직생활 그리고 사육신 사건과 관련된 일화 등을 소개하고 있답니다.

 

 

2. 박팽년과 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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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지곡',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세종실록', '오례'….

 

학창시절 국어시간과 국사시간에 열심히 외웠던 추억이 새록새록 하시지요? 세종 대에 쓰여지고 보급된 이 서적들에도, 18년 간 집현전 학사로 재직했던 박팽년 선생의 손길이 담겨 있습니다.

 

선생은 이렇듯 역사서 편찬과 훈민정음 창제 등 세종대왕이 남긴 업적마다 등장할 뿐만 아니라, 문종과 단종의 세자시절 교육을 맡을 만큼 학문적 위치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또 세종 대에는 국가의 기틀이 잡히고 안정화되면서 학문과 문화 발달도 이루어지는데요. 그 중심이 당대 최고의 명필이자 시문에도 뛰어났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었습니다.

 

그림 '몽유도원도'와 김종서와 박팽년 등 당대 문인 19인의 시문을 모아 엮은 '비해당(안평대군의 호)소상팔경시첩'에서 조선 전기의 빛나는 문화예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답니다.

 

특히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박팽년 선생과 무릉도원을 거닐던 꿈을 듣고 안견이 그린 작품이라서, 이번에 열린 탄신 600주년 기념 특별전의 주제로 '꿈속에서 도원을 거닐다'인가 봅니다. 낭만적인 주제죠?

 

몽유도원도의 맞은편에는, 꿈을 주제로 한 재밌는 체험 코너가 마련돼 있습니다. 내가 어젯밤 꾸었던 꿈과 앞으로 내가 이루고 싶은 꿈, 두 가지 뜻을 품은 꿈이라는 낱말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보는 자리입니다.

 

 

 

 

 

박팽년 선생은 글과 글씨, 경술 등이 모두 뛰어나 동료들이 가히 '집대성'이라 인정했다는데요. 선생이 직접 쓴 '천자문' 만 보아도 읽어내지는 못해도 그 글씨체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3. 계유정난의 어두움이 닥치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지요? 드디어 사육신으로서의 선생을 만나는 곳입니다일곱 폭의 그림과 글로 정리되어, 만화를 즐겨보는 아이들이 더 좋아합니다.

 

불과 열두 살 밖에 안된 어린 임금 단종이 즉위하자, 숙부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릅니다. 이에 반대하여 현전 학사 출신인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류성원과 무관인 유응부 선생 등이 단종복위를 꾀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이에 죽음으로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키는데요. 그 여섯 분이 사육신입니다.

 

"나는 상왕의 신하일 뿐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거늘 어찌 나으리에게 신이라 일컬었으리오!"

 

박팽년 선생은 모진 고문 끝에 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는데요, 선생을 살려주고 싶어했던 세조의 회유에도 당당히 맞섰다고 합니다.

 

 

4.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있었다 : 육신을 기록한 최초의 기록 '육신전'

 

 

 

 

 

생육신도 충절의 상징이시지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림으로써 절개를 지킨 여섯 신하가 있는데요. 이맹전, 조여,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 선생을 이릅니다.

 

 

 

이 중 남효온 선생은 '추강전'이라는 문집에, 사육신의 전기를 기록합니다. 이 '육신전'은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당시의 역적, 사육신을 기억한 최초의 기록으로. 이후 단종과 사육신의 복권을 이끌어내는데까지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5. 기억의 편린을 모아 : 우암, 박팽년을 말하다

 

 

 

 

 

제게 우암사적공원과 남간정사로 친숙한 송시열 선생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회 이상 그 이름이 등장할 만큼, 조선 후기 정치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라고 합니다.

 

송시열 선생은 같은 회덕 출신인 박팽년 선생에게 관심을 갖고, 그 충심을 기렸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결국 숙종 임금 대에 이르러 230여 년이 지나서야 신원됩니다.

 

여기서 박팽년 선생 집안에 얽힌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궁금하시죠?

 

당시 역적이라면 삼족을 멸하는 세상이었는데요. 박팽년 선생 집안도 아버지와 네 남동생들, 아들 삼형제까지 3대 9명이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집안의 여성들인 부인과 딸, 며느리들은 공신이나 관아의 노비로 삼았는데요. 선생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 부인은 회임한 채로 친정이 있는 대구 관아의 노비로 보내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부인이 해산하는 날, 어명이 내립니다.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노비로 삼아라."

 

성주 이씨 부인의 아들은 한날 한시에 태어난 친정집 여종의 딸과 바꿔치기하여 화를 면하고, 여종의 아들로 자라납니다. 박씨 성을 가진 천한 노비라 하여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데요, 17세에 성종에게 찾아가 자수를 합니다.

성종은 박비의 자수를 받아들였고 사육신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귀한 혈육이라는 뜻으로 일산(一珊)이라는 이름을 내려줍니다. 임금에게 귀한 이름을 내려받은 박일산은 그 후 외가 마을인 대구 묘골마을에 터를 잡았고, 이곳은 지금까지 박팽년 선생 혈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네요.

 

 

박팽년 선생의 7대손인 박숭고 선생은 사라져가는 사육신의 흔적을 모아 '육선생 유고' 등을 남겼고요. 9대손 박경여 선생은 단종의 왕릉인 장릉참봉, 12대손인 박기정 선생은 영월부사가 되어 단종사적을 정비했다니 단종과 선생 집안의 인연은 참 깊습니다.

 

 

 

 

6.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세조와 사육신, 단종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책으로 드라마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극적이고 매력적인 소재이고, 시대가 흐를수록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일제강점기에는 나라 잃은 슬픔을 대신하는 신문연재소설로, 독재정권시기에는 도의와 충성을 강조하는 교육자료로도 사용되었다네요.

 

여기서는 한국방송공사(KBS)의 지원을 받아 북한에서 제작된 드라마도 잠시 볼 수 있습니다. 이걸 보고 세조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경회루 연못에 투신하려던 박팽년 선생을 성삼문 선생이 구하고 후일을 도모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7. 사육신, 금기어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 단종 추복과 사육신 복권

 

 

 

 

 

세조 역시 "금세의 난신(亂臣)이나 후세의 충신(忠臣)이다"라며 안타까워 했을 만큼, 그 지조를 높이 샀던 사육신.

 

후세 사람들의 노력으로, 사육신은 1691(숙종 17)에 복관되고 단종은 1698(숙종 24)복위됩니다. 1791(정조 15)에는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을 배향하니, 역적의 이름으로 죽은 지 200여 년이 지나 비로소 나라에서 공인받은 충신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단종과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신주를 종묘 영녕전에 봉안하는 의식을 기록한 단종정순왕후복위부묘도감의궤도 있고요. 1758(영조 34) 10월에 박팽년의 시호를 충정()'으로 내린다는 교지도 있습니다.

 

 

 

 

40세라는 길지 않은 생을 살았음에도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되는 박팽년 선생. 이 가을, 선생의 자취를 더듬어 보며 대전역사박물관을 거닐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꿈 속에서 도원을 거닐다 : 박팽년 탄신 600주년 기념 특별전>

 

전시기간 : 2017년 9월 29일(금) ~ 12월 17일(일)

전시장소 : 대전시립박물관 본관 대전역사박물관 3층 전시실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안대로 398)

개장시간 : 오전 10시 ~ 오후 6시

휴관일 : 매주 월요일

관람료 : 무료

문의 및 전시해설 예약 : 042)270-86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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