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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공연

한 폭, 한 폭 그림처럼 번져가는 춤, 국립무용단 <묵향>

 

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대전예술의전당입니다.

 

 

지난 금요일도 많은 분들이 이 곳을 찾았습니다. 앙상블홀에서는 대전의 골목을 노래한 음악극 '솔랑시울길'이, 아트홀에서는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묵향'이 함께 무대에 올랐거든요.

 

 

공연 <묵향>. 전 먹의 향을 어찌 무대에 표현할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에 이 공연을 선택했습니다. 로비 한 곳에 마련된 포토존에서는 공연을 기다리며 인증샷을 남기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공연을 기다리는 다른 관객들 틈에서, 저만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없이 간 것 같아 어쩐지 부끄러웠네요.

 

 

자리에 앉고 공연을 기다리기까지 '저 하얀 토막들은 뭐지?' 싶었습니다. 불이 꺼지고서야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낸 무대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새하얗고 거대한 한지같은 네 폭의 막만이 무대 뒤편부터 바닥에까지 드리워져 있었죠.

 

 

그리고 와~ 절로 감탄이 나왔습니다. 한 폭 한 폭 새하얀 한지에 수묵채색화가 그려지는 순간을 보듯, 순백의 무대에 매·난·국·죽 등 사군자가 펼쳐졌습니다.

 

 

공연 <묵향>은 모두 여섯 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서무와 종무를 비롯하여 매·난·국·죽, 사군자로 나뉘는 각 장은 봄·여름·가을·겨울을 상징한다네요.

◇ 1장 - 서무

무대에 드리워진 거대한 한지 위에 '묵향'이라는 붓글씨가 써집니다. 극의 시작이자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거래요. 곧 콘트라베이스와 거문고의 중저음을 배경으로 하얀 도포를 입은 남성 무용수들이 등장합니다. 걸음 하나, 손짓 하나도 절제된 이것이 선비의 춤이겠죠?

 

[사진출처:국립무용단 누리집][사진출처:국립무용단 누리집]

 

◇ 2장 - 매화

1장의 무대가 새하얀 한지 위에서 펼쳐졌다면, 2장은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난 홍매화가 그 순백을 물들입니다. 옛 선인들은 이른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매화가 어떤 고난 속에서도 향기만은 팔지 않는다하여 매화를 조선시대 여인들의 절개에 비유했다지요?

홍매화빛 짧은 저고리에 3겹의 패티코트를 넣어 더욱 불룩한 치마를 입은 여성 무용수들은 그 자체로 가지 끝에 알알이 맺혀있는 꽃봉오리 같았습니다. 그녀들이 빙그르르 돌고 멈춘 곳에서 두 손 끝을 탁 펼칠 때마다 아! 매화가 피었습니다.

 

[사진출처:국립무용단 누리집][사진출처:국립무용단 누리집]

 

◇ 3장 - 난초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윽한 향이 천하일품이라는 난초. 여름날 숲 속을 연상시키듯, 혹은 가녀리나 곧은 난초잎을 떠올리게 하는 진초록 줄들이 무대에 그려집니다. 무대에는 먹빛 도포를 입은 선비가 등장하고, 곧 진초록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거문고와 가야금을 배경으로, 남녀 무용수가 서로 닿을 듯 말 듯 연인들처럼 몸짓하고, 뒤이어 다른 2쌍의 남녀 무용수들이 함께합니다. '이 세 쌍의 선남선녀들은 뭐지? 연인들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설명을 보니 곧은 기개를 품은 선비가 귀하디 귀한 난초를 치는 장면이라네요. 아, 부끄러워라~

 

[사진출처:국립무용단 누리집][사진출처:국립무용단 누리집]

 

◇ 4장 - 국화

제게는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습니다. 지금이 가을이라 더욱 그런가요? 무대 위가 황금빛 들녘처럼 환해집니다. 검은 저고리에 풍성한 노란 치마를 입은 여성 무용수들의 몸짓 따라 네 폭의 한지 위에는 노란 국화가 한 송이 한 송이 피어올랐습니다.

 

[사진출처:국립무용단 누리집][사진출처:국립무용단 누리집]

 

◇ 5장 - 오죽

4장이 우아했다면, 5장은 가장 역동적이었습니다. 다시 본래의 새하얀 무대 위에 먹빛 철릭을 입은 남성 무용수들이 3m 길이의 긴 장대를 들고 등장합니다. 창술을 연상시키듯, 장대에 의지해 하늘을 가르고 도약하는 무용수들의 힘찬 몸짓은 선비의 올곧은 기개를 표현한 것이래요.

 

[사진출처:국립극장 누리집][사진출처:국립극장 누리집]

 

◇ 6장 - 종무

시작이 있다면 반드시 끝이 있으니, 전체를 마무리하는 6장은 사계절의 조화와 자연의 이치가 남녀 무용수들의 군무로 표현된 거랍니다. 서무와 대비되는 잿빛 무대에서 가야금과 바이올린이 함께 연주되어 동양과 서양이 어우러지고, 남녀가 어우러져 음과 양이 만나는 순간이었죠.

 

 

배경지식 없이 찾았던 무대인지라, 막이 내린 뒤에야 안내책자를 꼼꼼하게 읽어보았습니다. <묵향>은 안무를 맡은 윤성주 예술감독이 스승 최현 선생의 유작 <사군자>와 <군자무>에서 영감을 얻었대요.

또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절제된 한복과 세련된 미디어 파사드를 떠올리게 하는 무대는 연출을 맡은 정구호 패션디자이너의 작품이래요. 패션디자이너가 무용작업을 한다니, 정말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의 시대입니다! 게다가 이 분은 배용준과 전도연 주연의 영화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로 제41회 대종상 영화제 의상상을 받은 분이래요. 와우~

<묵향>은 우리 전통춤의 멋을 현대적 감각으로 보여줬다는 관객의 호평에 힘입어 2013년 초연 이후로 국립무용단의 대표작이 되었답니다. 2015년 일본 오사카 NHK홀 공연을 시작으로 올해 2월 4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홍콩예술축제'에 한국무용 장르로 처음 초청되어, 현지 관객의 호평 속에 전회 매진을 기록했대요.

또 6월에는 70년 역사의 프랑스 레 뉘 드 푸르비에르 페스티벌에 한국 작품으로는 최초로 최대를 받아 극찬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와~ 세계에서 알아주는 무대를 이렇게 만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