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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상/시사ㆍ사회

여권통문 들어보셨나요?대전시청에서 양성평등주간 전시

 

여권통문(女權通文) 들어보셨나요?

역사에 비교적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편인데 '여권통문'을 처음 들었어요.

양성평등주간을 맞아 4일부터 7일까지 대전시청 1층과 3층 로비에서 우리나라 근대 여성사 전시가 열립니다.

학창 시절에 국사를 배울 때 제일 끝에 나오는 근현대사는 진도에 쫓겨 대충 넘어가거나 미처 마치지도 못해서 기말 시험 범위에서는 항상 빠져있었죠. 아마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거예요. 기말 시험 범위에라도 제대로 들어가 있었다면 한 번이라도 더 열심히 보았을텐데…. 이 전시를 보면서 후손된 사람으로 많이 부끄럽고 가슴 아려왔습니다. 


여권통문


 

유럽 서방세계가 18세기 초엽 산업화에 먼저 성공하여 힘과 부를 쌓은 후, 동양의 깊은 문화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문화가 최고인양 포장하며 잘난 척을 하였어도 앞서가던 영국에서조차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 것은 1918년(30세 이상의 여성)과 1928년(남성과 똑같이 21세 이상의 여성)이었습니다.

참정권을 얻기 위해서 19세기 말부터 영국 여성들이 단체를 만들어 운동을 펼치고 단식 투쟁도 하며 강력한 당국의 진압에 대항하여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터로 떠난 남성을 대신하여 여성이 전시 노동에 동원되었는데 그 보상으로 내놓은 것이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참정권을 준 것이라지요. 

그런데 이번 전시를 보니, 앞뒤로 꽉 막힌 것처럼 배웠던(알고 보니 일제 사관에 의한 역사를 배운 것) 것 같은 1898년 대한제국 시절에 이미 여성의 권리를 선언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여권통문(女權通文)으로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을 주장하였다니~! 

동학의 남녀평등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 여성선교사의 활동도 원동력이 되었고 여권통문(女權通文)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이라고 합니다.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여자 저격수 안옥윤은 가상의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런 활동을 펼친 여자 독립군이 적지 않았다고 하지요. 남자현은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여머니로 일컫는 분인데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며 암살 계획 활동을 했다고 하고요. 이화림은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낸 분으로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으로 활약하였다니 여자복무단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한 활약하다 돌아가신 여자 독립군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1905년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였을 때 국채를 갚기 위해 1907년에 국채보상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알고 있습니다. 당시 여성들이 금가락지와 금비녀를 모금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아래 사진에서 우측 위의 한글 문서가 바로 '패물폐지 부인회 취지서'입니다.

 

 

"대저 부모가 빚이 있으면 자식이 감당할 바요. 국가에 빚이 있으면 국민이 감당할 의무라. 국가가 온전치 못하면 백성이 어찌 안보리요. 듣사온즉 의견이 높으신 동포님네들이 애국지성이 선발하여 국채를 보상하기로 단영 동맹하신다 하오니 어느 뉘가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IMF 국제금융에 발목 잡혔던 시절, 우리가 자발적인 금모으기 등으로 빠른 시간 내에 벗어날 수 있던 것은 이런 조상님의 뜻이 우리에게 흐르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네요~!


대한독립여자선언서 1919



위의 사진은 대한독립여자선언서입니다. 저는 이것도 처음보고 이런 것이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기억을 못할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에 앞선 2월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이 나온 후 만주에 있던 애국부인회 8명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서명하여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원본이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니 다시 가서 자세히 보아야 하겠습니다.


직업권 교육권



여권통문(女權通文)으로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을 주장하였고, 위와 같은 역할을 하며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한일 늑약으로 나라를 잃자 여성의 참정권은 민족독립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1919년 4월11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함"이라고 문서로  공포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남성이나 여성이나 참정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지만 문명국이라고 자부하던 영국이 1918년에 일부 참정권을 허용한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 대대로 살아온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민주주의적 성향을 가슴에 담고 살아왔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 나라가 위급할 때 자발적인 의병활동으로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백 년 남짓한 짧은 역사 속에 엄청난 발전을 이룬 바탕에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나라의 기틀을 잡는 바탕이 되었던 여성들이 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런 전시를 보면서 역사 속의 우리를 기억하고, 더 이상 양성평등이란 말이 필요하지 않고 남성이건 여성이건 함께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마음을 갖게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