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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축제ㆍ행사

순국지사 연재·심석재 선생 기념조형물 준공식







순국지사 연재ㆍ심석재 선생 기념조형물 준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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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전광역시 블로그기자단 김지은입니다.


3월도 시작되었고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전 안에서도 크고 작은 지역 소식이 들리겠지요? 오늘은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인 문충사(文忠祠)에서 있었던 순국지사 연재·심석재 선생 기념조형물 준공식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동춘당/쌍청당은 알았지만 문충사는 처음 가봤네요. 기회가 생긴다면 대전에 있는 크고 작은 문화재를 돌아보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담아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문충사(文忠祠)


지정번호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4호


유학자 송병선(1836~1905), 송병순(1839~1912) 형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사우이다. 두 형제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후손으로 형 송병선은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처단과 국권회복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동생 송병순도 나라가 망하자 형의 뒤를 따랐다. 사우는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에 맞배 기와 지붕을 올렸으며, 간결한 익공계 건축양식으로 지었다. 건물 입구쪽에 홍살문과 충신정려각이 있고, 경내에는 문충사, 용동서원과 외삼문이 있다. 원래는 1908년 충북 영동에 사우를 세웠다가, 1966년에 선생의 고향 근처인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천천히 문충사를 둘러보았습니다.


문충사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환승했었지요. 

판암 주공아파트에서 내려 준공식이 있었던 문충사를 찾아 걸어갔습니다.

동춘당처럼 주변이 아파트와 주거단지로 둘러 쌓여있었고 그 가운데 문충사가 있었습니다.


문화재라 하면 왠지 교외에 있을 거 같고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을 거 같은데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요!

문화재의 규모를 떠나 문화재가 곁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이제 3월 4일 문충사에서 있었던 순국지사 연재·심석재 선생 기념조형물 준공식 현장을 살펴볼까요?




건물 입구 쪽에 홍살문과 충신정려각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지난 4일 대전광역시 동구 문충사에서 오후 2시부터 준공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식전행사로 가곡과 선비춤이 있었습니다.





준공식 개회선언 이후 내빈소개와 함께 

문충사이사장 전재환님의 인사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명헌 대전보훈청장님의 기념사가 있으셨지요.




기념조형물 제막


대전광역시는 국가보훈처로부터 국비를 지원받아 문충사 주변시설 정비와 함께 기념조형물 제작설치를 완료했으며,

 올 하반기 추경예산을 편성해 사당 단청 및 전통정자 설치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기념식수




항일 순국지사 연재 송병선 선생과 심석재 송병순 선생의 기념조형물





송병선(1836~1905)


송병선은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 호는 연재(淵齋)이다. 1863년 현 동구 성남동 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백부 송달수에게 배우고 숙부 송근수의영향을 받아 가학을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특히 9대조인 우암 송시열의 도학과 의리정신을 이어받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청토흉적소와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등의 십조봉사를 올렸다. 서울에 올라가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 운동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일제에 의래 고향(대전)으로 강제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 강탈에 대한 통분으로 11월 29일 유소를 남기고 순국하였다. 사후에 의정부 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송병순(1839~1912)


송병순은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다. 1839년 현 동구 성남동 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형인 연재 송병선과 같이 백수 송달수에게 배우면서 가학(家學)을 독실하게 계승하였다. 송병선과 더불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자들과 교류하고 제자들과 경전을 토론하며 저술 활동에 힘썼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원통해하고 자정(自靖)하면서 저술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905년 형인 연재 송병선이 순국하자 그 유지를 받들어 도학을 계승하는 한편, 항일정신을 투철히 다지며 근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가족과 제자의 만류로 실패한 후 두문불출하였다. 1912년 일제가 경학원강사로 임명하자 거절하고 마침내 일제 통치에 항거 순국하였다.






이번 문충사 기념조형물 준공식을 통해 우리 지역의 문화재를 알아보고

항일 순국지사의 애국정신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더 의미 있었습니다.




좌 연재 송병선, 우 심석재 송병순 선생



시 문화재자료 제4호인 문충사에 배향된 연재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을 반대해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와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린 뒤 국권 강탈에 대한 통분으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순국지사다. 또 그의 동생인 심석재 선생도 형의 뒤를 따라 1912년 일제통치에 항거해 자결하며, 형제가 함께 순국지사로 추대됐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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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지사 연재ㆍ심석재 선생 기념조형물 준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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