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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스포츠

[2013년 한화이글스를 말하다] 또 다른 시작을 알리다. "고동진"

 




 

[2013년 한화이글스를 말하다또 다른 시작을 알리다. "고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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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에 있어서 2012시즌 9월의 분전은 실로 놀라운 시간이었다. 감독 경질의 후유증으로 도망치듯 시즌을 마무리할 것이라는 주위의 우려와는 다르게 몇 경기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제대로 된 고추 가루 부대로의 변신, 여기에는 명물 허전  김태균의 고감도 타격 머신같은 활약이 있었기에 그랬겠지만, 그보다는 한화의 고치로 고동진의 활약이 눈부시게 빛났기에 그랬다.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돋보이는 활약은 없었지만, 여름을 넘기고 올라서기 시작한 고동진의 반전 같은 야구, 9월 월간 타율 0.348 말해주듯 이 기적의 페이스 그 자체 였다. 일부에서는 이제야 "고동진이 야구에 눈을 떴다" 고 했지만 ... 그랬지만... 하늘은 그런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문제는 무릎, 프로 생활을 하는 동안 만성적으로 그를 괴롭혔던 무릎이 끝내 말썽을 부렸다. 무릎연골 마모로 인한 수술 그렇게 2012년 고동진의 야구는 저물어갔다. 그래서 아무도 2013시즌 그의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새로운 도전으로 시작했던 2013시즌, 고동진의 이야기다.

          

기다리다

사실 프로선수에게 부상은 숙명 같은 것이라고들 한다. 매년 130여 경기를 치루는 동안 별에별 일들속에서 부상은 어쩌면 달고 사는 내안에 또 다른 나와 같은 것이라지만, 전성기를 눈 앞에 두고서 그라운드와 멀어져야 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같은 고통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고동진은 2004부터 쉼없이 달려왔었다. 그리고 그런 대세의 시간을 9월로 마무리하고 수술을 택했던 것은 더 큰 내일을 위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고동진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을 했었지만 무릎 통증은 한 해 두 해의 고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무릎의 연골이 마모가 됐을 정도니 그 아픔은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나 공격보다 수비 시, 더 많은 활동량을 원하는 외야 포지션이었기에 큰 아픔을 이겨내야 했으니 오죽했을까 (그래서 재활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는 후문이다.)


그렇다고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2013시즌을 앞두고 새롭게 부임한 김응룡 감독 체제에 시즌을 앞두고 합류한 군 제대자들의 러쉬가 엿보였기에 그랬다. 2012시즌부터 꿈틀대기 시작했던 연경흠이 외야의 한자리를 노크하고 있었고 퓨처스를 평정한 정현석의 합류, 거기에 한화 토종 거포의 자존심 김태완마저 외야를 노리고 있었기에 2012시즌과는 다른 판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불안감이 넘쳐났겠지만, 고동진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부담을 담담히 토로했다.


" 어차피 매년 마다 말하고 느끼는 것이지만 주어진 자리는 없습니다. 1년 주전으로 뛰었다고 다음해에도 주전으로 뛰는 건 몇 명 안되죠, 우리 팀처럼 전력이 약한 팀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3월이 될지 4월이 될지 또 5월이 될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몸을 만든 다음 돌아올 기회를 잡을 생각입니다. 기회를 살려 팀이 더 이상 꼴찌를 하지 않게끔 보탬이 되겠습니다."

그는 그랬다.  팀에 있는 경쟁자속에서 살아남겠다는 것보다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때를 기다리겠다. 이것이 고동진의 마음이었다.





 


4월의 악몽

하지만 막상 4월의 장이 펼쳐지고 나니 상황은 팬들의 생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거포들의 등장으로 기대했던 공격에서의 시너지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수비에서의 연이은 허술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상황까지 이르렀고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최진행까지 빠지면서 그야말로 80년대 실업야구를 능가하는 외야로 전락하게 돼 버렸다. 


가장 큰 원흉은 역시나 지명타자와 1루수 정도로 일관했던 김태완의 기용이 가장 큰 주범이었겠지만 문제는 넓어질 때로 넓어진 외야는 수비범위가 넓지 못한 한화 외야수들에게는 아프리카의 세링게티 평원과도 같았다. 거기에 마땅한 1번 타자를 없었던 ( 개막일에 한화는 내세울 1번 타자의 부재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강동우는 부상의 터널에 빠져있었고 좀체 자리를 잡지 못하는 하주석도 1군에 올릴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선택은 이대수) 한화가 이대수를 개막부터 1번으로 기용하면서 전체적인 타순의 조화가 흐트러졌었고 이것이 팀의 연패와 맞아 떨어지면서 그야말로 고동진의 공백은 더없이 필요해져 있었다.


(3월 30일부터 이대수가 1번으로 4월을 버텨냈다. 분명한 것은 이대수는 고감도의 타율[4월 0.307]을 선보였던 것은 맞았지만, 문제는 3할을 넘는 타율을 기록했음에도 1번으로서 도루를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는 점 [도루 실패 1개]은 뼈아픈 4월의 이유이기도 했다. 4월 27일 부터 오선진이 1번으로 나섰지만, 오선진도 예전의 오선진[4월 0.218]이 아니었다.) 


이런 시점이다 보니 4월 30일에야 돌아온 고동진을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롯데전에서 보였던 2안타는 고동진의 화려한 신고식을 알렸다.

      

속절없는 시간들

그렇지만 야구가 마음먹은 데로 되면 야구가 아니듯이 고동진이 돌아왔다고 해도 떨어질 때로 떨어진 팀의 분위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못했다. 그래도 한화가 계속해서 매년 터닝포인트를 찾았던 5월이 왔음에도 이렇다 할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면서 고동진도 묻혀가는 시간에 빠지게 된 것이다. 특히나 문제는 역시나 회복되지 못한 경기 감, 다른 선수들이 전지훈련으로 몸을 만들 때 재활로 시간을 보냈던 겨우내의 시간이 복귀를 했다고 했지만 곧바로 나타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더 어려웠던 5월이었다. (5월 월간 타율이15경기 타율0.189이었다.) 


하지만 고동진은 고동진이었다. 6월 초반은 퓨처스에서 영점을 조절하더니 바로 6월 월간 타율 0.322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7,8월에 다소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또 다시 9월 대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며 월간 타율 0.367까지 끌어올리며 다시 한번 개인 통산 최고의 타율로 0.272 마무리를 했다.  부상과 재활로 다른 선수들에 비해 한 달이나 늦게 시즌을 시작했음에도 값지게 만든 기록이 아닐 수 없었다.

 

 


      

 

 

미련

그러나 필자의 마음은 고동진 개인적으로는 최고 타율을 이끌어낸 한 해라고 기뻐할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다. 그것은 올해도 풀지 못한 1번 타자의 숙제를 고동진이 해주지 못한 부분이 가장 아쉽기 때문이다. 특히나 고치로라는 별명처럼이나 날렵하고 화끈한 플레이를 갈망하는 팬들에게 올해 고동진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그 이유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상의 여파나 감독의 들쭉날쭉한 기용도 발목을 잡았던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93경기 출전에 도루가 4개, 병살 11개는 어딘지 고동진의 모습과는 어색해 보인다. 

 

그렇기에 2014년 고동진이 가야 할 길이 멀지도 모르겠다. 내년에는 또 다시 조금은 다른 해가 고동진에게 놓여 있다. 올시즌처럼 또 다시 기존의 경쟁체제에서 살아남는 것도 과제가 되었지만 젊은 박상규, 장운호 같은 또 다른 새내기의 도전이 거셀 것이 예상되되기 하지만 그보다는 더 큰 산 이용규, 정근우의 합류는 단번에 그를 뒤로 밀려나게 할지도 모르기에 그렇다. 그리고 팀의 주장 완장도 어쩌면 리더라의 책임감이 더 큰 어깨의 짐으로 남을 지도 모르겠다. 


"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이 라는 말이 있다. 모든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는 2014년, 고동진의 비상을 기대해본다.

ⓒ한화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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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한화이글스를 말한다, 또 다른 시작을 알리다 '고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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