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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행

[대전여행] 대청호를 둘러보자~! (세천유원지에서 대청댐까지)




"대청댐을 둘러보자~!!"



내가 가끔 찾는 곳이 있다. 

내가 사는 대전 식장산 자락부터 대청댐까지 대청호변을 느긋이 가다보면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 진다.
일단은 드라이브 코스로  소개하고  자세한 내용은 생각나면 하나하나 올리는 방향으로 정하였다. 
 대청댐은 광장부터 가볍게 한 번 둘러보는데 약 80km가 소요된다고 한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려면 2배 이상의 거리와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식장산부터 대청댐까지 계족산 너머의 호변이다. 

보은 쪽은 일단 대전을 넘어가니 혹 물으시는 분이 계시면 아느만큼 답 드리는 걸로 정하였다.  봄에 찍은 사진과 가을에 찍은 사진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 있으리....




1.  식장산 자연 생태림 세천공원

세천 유원지엔 1934년 대전 최초로 수돗물이 공급된 수원지이다. 
물은 숲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대청호를 살포시 껴안고 있는 숲이 빗물을 머금었다가 서서히 흘려보내면서 맑고 깨끗한 물을 계속 공급해주기 때문에 나는 이 소중한 숲을 " 녹색댐"이라 부르리라.....  또한  세천 공원은 생태보전림으로 지정하고 자연 환경 보존과 복원에 힘쓰고 있어 많은 동식물의 서식지가 되고 있다.





2. 군사적 요충지 마달령

옛부터 고개가 대단히 험준해서 말 한 필이 겨우 넘을 수 있다하여 말 마(馬)자에 통할 달(達)자를 써서 마달령이라 이름 하였다.
대전에서 옥천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백제때에는 탄현이라고 해서 백제 충신 성충이 의자왕에게 신라 군대가 이 곳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간언했던 지역임을 볼 때 백제와 신라간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있다.





3.김정선생 묘소와 신도비 

'불천위' 라고도 불리는 별묘는 조광조와 함께 조선의 개혁을 주도했던 김정 선생의 (1486~1521)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우로서 원래 대청댐 수몰 지역인 내탑동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인조 19년(1641)에 세워진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그 앞으로 충암 선생 탄신 500주년기념사업회가 세운
이 신도비의 국역비(國譯碑)가 세워져 있다





이장 후 현몽으로 찾은 백 비  
부인 은진 송씨가 100년 후에는 모든 누명이 벗겨질것이니
그 때 새기라며  제주도에서 운반해와 관과 함께 묻었던 백 비 

백 비 (白碑) : 글씨가 새겨지지 않은 비석




山海堂 우암 송시열이 충암 김정 선생의 성품을
 "높은 산과 같고 넓은 바다와 같다 山高海活"
고 한데서 연유한다.




내탑리에서 이장할 때 김정 선생 관으로 쓴 현판 





이 번에 새로 보수한 모습이다.




"은진송씨 정려"


기묘사화로 남편 김정이 사약을 받자 부인 은진 송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면서 조카를 양자로 들여 정성껏 키웠다.
시부모 상을 당하자 삼년상을 치르고 남편 제사를 지낸 후 식음을 전폐하다
8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 효심을 칭송하여 순조 3년에 정려를 내렸다.





 4. 황씨 가문의 덕행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미륵원  봉사

마산동(내탑)에 있던 미륵원은
고려. 조선시대에 영호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회덕의 토족인 회덕 황씨 가문에서  고려조에 가선대부 병부전서를 역임한 황연기는
회덕에 전해져 오던 미륵원을 (회덕지방에 있었던 행려자를 위한 숙소 ) 릏 재건하고
해마다 시주하여
겨울에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후손에게 이 일을 이어가도록 유언하였는데
이 사실이 목은 이색의 <남루기 南樓記 >에 수록되어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1300여년대부터  그의 후손인 황호가 금성 대군과  단종 복위 운동으로 멸문지화를 당할 때 까지 대를 이어가며 삼남을 유행하는 과객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적선을 베풀었던 사립여관으로 요즘으로 말하자면 "대전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이다.

현재는 대전에서 "복지 만두레"란 명칭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륵원남루기 - 이색




남루중건기









남루제영기 - 이색, 하륜, 변계량, 성석린, 정인지, 송시열등 24인이 지은 시




황연기 壇所






내가 들어가니 친구분과 식사 중 이었는데  더구나 남에게 베풀던 집에  왔으니
그냥 가면 선조께 누가되어 안된다며 기어이 밥을 내어 주신다.





미륵원

올 여름 가믐이 들어 미륵원 터  (건물지의 흔적)가 훤히 보인다.

- 나무에 가려진 부분은 남루
- 물 밖으로 나온 부분이 평상시 수몰되는 미륵원 터

현재 미륵원터의 절반 가량은 후대에 지은 재실이 있고, 나머지는 수몰돼 봄철 갈수기에나 볼 수 있어 먼 옛날 후덕한 인심을 베풀었던 흔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5. 관동묘려 


은골에는 회덕 황씨 황수의 사위인 송명의 (회덕송씨 <=은진송씨>의 중시조) 가 혼인으로 회덕 황씨와의 족적 결합으로 인연이 되어 회덕 송씨의 입항조가 되며  
청빈한 선비로 유명한 그의 손자 쌍청당 송유(1389~1446)선생의 어머니 고흥 류씨 부인의 묘소가 있는데 관동묘려는 제사를 지내는 재실이다.

류씨 부인은 22세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친정에서 재가를 시키려 하자 4살 된 아들 송 유를 업고 개성에서 이 곳 회덕까지 내려와 시부모 송명의를 극진히 모시고 아들까지 훌륭하게 키워낸 열부로 정려를 받게 된다.

류씨 부인은 은진 송씨 문중에서 류씨 할머니로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고 송유의 후손으로 동춘당과 우암같은 대 유학자를 배출한다. 

대덕구 법동에 은진 송씨 대 종가와 쌍청당, 고흥 류씨 정려각이 있다.





영락없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거북 섬  (관동묘려 앞에 있다)


원래 시 외가인 회덕 황씨가의 묘자리에 밤 새 물동이로 물을 퍼 부어 묘를 옮기게 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묘를 썼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지금도 회덕 송씨가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5일에 류조비의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고 있다.

여기는 중리동에 있는 고흥류씨정려각과 비








정문 옆에는 1665년(현종6) 동춘 선생이 비문을 짓고 우암 선생이 쓴 정려비가 서 있는데
정려를 받게 된 내력과 후대까지 정려를 보존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내가 대전 곳곳을 돌아보니 대개는 비문 글씨는 동춘 선생이 썼으나
이 비는 반대로 동춘 선생이 비문을 짓고 우암 선생이 글씨를 써서 서예 하시는 분들이 글씨를 보러 많이 찾고 있다고 ...... 


난 글씨를 모르기에 할 말이 없지만 말을 듣고 보니 두 분의 글씨가
한 분은 섬세하게 느껴지고 또 한 분은 활기 찬 기상이 보이는데.....  ㅎㅎㅎㅎ

서예하시는 분들이 기가 막히어 웃으시겠다.  




6, 대청호 주변 산성 


대청호수는 수려한 경관과 어울리지 않게 사방이 산성으로 둘러싸인 호수이다.

그 옛날 금강이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이기 때문에 지금의 대청호수를 경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백제 멸망의 전초가 되었던 관산성이 인근에 있고 
김정 선생 묘소 동쪽으로 고리산성을 비롯,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백골이 많이 묻혀 있어 백골산성, 피가 내를 이루어 피골이라 불리는 곳의  노고산성부터 계족산성까지...

 아마 봉우리마다 산성이 하나씩 자리잡고 있는 건 아닌지...  



관산성 (옥천군
)

7. 휘돌아가는 금강이 품고 있는 미호 서원지와 취백정 

동춘당, 우암과 함께 삼송이라 불리우는 제월당 송 규렴(1630~1709)이 숙종때 양 송이 유배 당함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이 곳 미호에 취백정을 세워 학문 연마와 후진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던 곳이다. 

대덕구 읍내동에 송 규렴이 살았던 제월당이 있다.


 

8. 금강가에 있는 차륜주, 차륜도 형제의 효자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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