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온천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오늘날과 같은 명성의 토대는 20세기 일제 강점기부터다. 불행했던 이 시기, 대전은 일제가 식민도시로 건설한 도시 중에 하나로 탄생된다.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유성온천이다. 근대 유성온천을 보여주는 6개의 장면 속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역사의 단면이 날 것 그대로 담겨 있다.
장면 1. 공주갑부 김갑순
유성온천의 개발에는 친일파 ‘공주갑부 김갑순’을 빼놓을 수가 없다. 대전에서 유성온천까지 운행하는 차량 노선이 있었는데 그가 소유한 김갑순 자동차부(金甲淳 自動車部)소속이었다. 1922년 무렵이 되면 유성온천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때 김갑순은 “유성온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주주”(동아일보 1922년 7월 9일자)가 된다. 그 뒤에 전신전화소가 들어서고, 1928년에는 “유성온천도로가 개통”을 했다. 조선시대 왕들이 찾아오던 지방의 한적한 온천에서 식민지 근대 도시의 세례를 받은 휴양지로 변모한 것이다.
장면 2. 일본 군인들의 고급휴양소, 여관 봉명관
여관 봉명관은 현재 계룡스파텔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 봉명관이 조선신문 1928년 1월 3일에 신년맞이 광고를 냈다.
이날 신문을 보면, ‘유성신온천 여관 봉명관’이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봉명관은 1925년 문을 열었는데 주로 일본 고위 군인이 애용하는 고급휴양소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1936년 3월 17일 조선총독부의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清徳) 정무총감이 대전역에서 유성온천으로 이동하는 사진이 찍혀, 그때를 증언한다.
장면 3. 겨울의 낙원이라는 유성온천
1928년 11월 15일자 매일신보에는 “겨울의 낙원 온천의 자미(자양분이 많고 좋은 음식-필자)”라는 글이 실린다.
“유성온천은…위아치가 풍부하고 조용한 보양지로 가족을 동반함에 조코…공동욕장이 설비되여잇서 부근 이삼의 온천숙에서 욕객들이 단이며…신온천의 봉황장은 만철시대에 자금을 투하야 훌륭히 건축한 것으로 내탕도 잇서 항상번창하고 대전으로부터 하차한 여객은 갓흔갑이면 온천이 좃타고…”
당시 신문에서는 조선의 대표적인 온천을 겨울의 낙원으로 소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유성온천이었다. 일본인들에게 각광 받는 곳이었으나 겨울의 낙원을 즐길 수 있는 조선인이 몇이나 되었으랴.
장면 4. 신흥대전의 오아시스 유성온천
1936년 8월 9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유성온천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기사의 제목은“신흥대전의 오아시스 유성온천을 찾어”이다.
해당 기사는“대중적이면서도 좀더 근대적인 유성온천호텔이 20여만원의 거액을 투자하여 지난 4월부터 개업하야 신흥도시대전부민의 유일한 유원지 유성온천은 겨우 그 체면을 유지하게”되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한다.
장면 5. 이박사와 굿펠러의 만남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23일, 유성온천호텔에 이승만 박사가 한 미국인을 만나 회담을 나눈다.
그는 누구일까? 그의 이름은 프레스턴 굿펠러(Preston M. Goodfellow), 그의 직함은 미군사령관의 정치고문. 이때가 미군정시기인 것을 감안하면 두 인물은 밀담을 나누었을 테지만,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내용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장면 6. 자가용, 식당완비, 천하의 영험한 물
1948년 가을 유성호텔에서 손님을 유치하기 위한 광고를 냈다. ‘자가용자동차완비’ ‘각종침실’‘식당완 비’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천하의 영험한 물과 한가하고 고요한 곳’이라는 광고카피를 쓴다. 유성온천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고급휴양지였을 것이다.
낙원, 신흥대전의 상징, 천하의 영험한 온천…. 6개의 장면에 등장하는 일제강점기 근대 유성온천은 현재보다 더 화려하고 멋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식민지 지배의 그림자와 친일파의 흔적이 그늘져 있기도 하다. 6개의 기록은 유성온천의 빛과 그림자를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대전의 기록이다.